33. 여랑중 융체에게 답함
당신의 형 거인에게서 두 통의 편지를 받아보니 이 일을 위해 매우 바쁘다고 하니 그러나 또한 마땅히 서둘러야 합니다.
나이가 이미 60이요 관직에 종사함도 또한 마쳤으니 다시 무엇을 기다리리요.
만약 일찍 서두르지 않는다면 죽음이 닥쳐오면 어떻게 정리하여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들으니 그대도 근래에 일찍이 서두른다고 하니 다만 이렇게 서두르는 것이 곧 죽음에 대처할 소식입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른 똥막대기니라> 이 속을 투과하지 못하면 죽음이 닥쳐오면 (다른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서생(書生)들은 일생토록 낡은 종이만 파고들되 이 일(일대사인연)을 알고자 하여 널리 여러 책을 열람하며 고상하고 넓은 담론으로 공자(孔子)는 또한 어떻고, 맹자(孟子)는 또한 어떠하며 장자(莊子)는 또한 어떻고 주역(周易)은 또한 어떻고 고금(古今)의 평화로울 때와 혼란할 때는 어떻다 하여 이런 사소한 말들의 부림을 당하여 칠전팔도(七顚八倒: 마음이 어지럽다)하며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막 어떤 사람이 한 자를 드는 것을 듣고는 곧 책을 이루도록 생각하되, 하나라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부끄러움으로 삼다가 그 자신의 본분사를 물음에 이르러서는 전혀 한 사람도 아는 이 없으니 종일토록 다른 사람의 보배를 세다가 스스로는 반푼의 돈도 (얻은 것이) 없다고 이를만합니다.
공연히 세상에 와서 한 평생 살다가 이 몸뚱이를 벗어버리면 천상에 오르는지, 지옥에 들어가는지 알지 못하고 업력(業力)을 따라 육도(六道)에 들어감도 전혀 알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의 크고 작은 것은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사대부가 읽은 책이 많은 것은 무명(無明)이 많은 것이고, 읽은 책이 적은 것은 무명이 적은 것이며, 행한 관직이 낮은 것은 아상(我相)이 적은 것이고, 행한 관직이 높은 것은 아상(我相)이 높은 것입니다.
스스로 나는 총명하고 영리하다고 말하다가도 아주 작은 이익과 손해에 대해서는 총명함을 볼 수도 없고 영리함을 볼 수 없으며 평생 읽은 책은 한 자도 소용이 없으니 대개 어린 시절로부터 곧 어긋나 다만 부귀함을 얻고자 합니다.
부귀함을 취하는 자 중(中)에 몇 사람이나 생각을 돌려 자기 근본에서 추궁하여 ‘내가 이렇게 부귀를 취하는 것은 어느 곳으로부터 왔으며, 지금 부귀함을 받는 것은 다른 날에 다시 어느 곳을 향해 가는고?’ 하겠습니까!
이미 온 곳도 모르며 또한 간 곳도 모르면 곧 마음이 어둡고 답답함을 느낄 것이니 바로 어둡고 답답한 때가 또한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속에 나아가 화두를 들되 <어떤 스님이 운문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운문스님이 이르시되 마른 똥막대기니라.> 오로지 이 화두를 들다 보면 문득 기량이 다 할 때 곧 깨닫게 됩니다.
절대로 문자를 찾아 증거를 대어 어지러이 헤아려 주해(注解: 풀어서 이해하다)하지 마십시오. 비록 분명하게 주해하며 설명하여 낙처(落處)가 있더라도 모두가 귀신의 살림살이입니다.
의정(疑情)을 깨뜨리지 못하면 생사가 서로 더해가며 의정을 만약 부수면 생사심이 끊어질 것입니다.
불견(佛見), 법견(法見)도 오히려 없는데 하물며 다시 중생의 번뇌의 견해를 일으키겠습니까? 어둡고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건시궐(乾屎橛)> 위에 옮겨 놓아 한 번 겨룸에, 겨루다 보면 생사를 두려워하는 마음과 어둡고 답답한 마음 사량 분별하는 마음과 총명함을 일으키는 마음이 자연히 행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행해지지 않음을 느꼈을 때 공(空)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홀연 겨루는 곳에서 소식이 끊어지면 평생에 경쾌함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소식이 끊어짐을 얻으면 불견(佛見), 법견(法見), 중생견(衆生見)을 일으키며 사량, 분별하고 총명을 일으켜 도리를 말하더라도 모두 상관이 없습니다.
일상생활 가운데 다만 항상 놓아 걸림이 없게 하여 고요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에서 항상 <건시궐(乾屎橛)>을 든다면 날이 가고 달이 가면 물소(마음)가 자연히 익어(순수)질 것입니다.
첫째로 밖에서 달리 의심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건시궐>에서 의심이 깨어지면 항하(恒河)의 모래와 같이 많은 의심이 한꺼번에 부서질 것입니다.
이전에 일찍이 또한 이와 같이 써서 여거인에게 주었는데 근래 조경명(趙景明)이 옴에 편지를 받아보니 편지 중에 재차 물어 와서 이르되 이것을 여의고는 달리 공부를 착수하는 곳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단지 손을 들고 발을 움직이며 옷을 입고 밥 먹을 때는 마땅히 어떻게 궁구해 체달해야 합니까? 다시 다만 화두를 들어야 합니까? 또한 별도로 궁구해 체달해야 합니까? 또한 평생에 일대사를 지금에 이르도록 끝내지 못했으니 단지 죽은 후에 단멸(斷滅)함과 단멸하지 않음을 어떻게 확실히 볼 수 있습니까?
또한 경론(經論)에서 설한 바를 인용하지 말고 조사의 공안을 가리키지 말고 오로지 눈앞을 의거하여 바로 꺾어 분명히 단멸과 단멸하지 않은 실처(實處)를 분석 판단하여 지시해 달라고 하니 그의 이와 같이 말함을 보면 도리어 서너 마을집의 할일 없는 놈이 도리어 허다한 분별망상이 없어 죽으면 죽어서 문득 벗어버림만 못합니다.
분명히 그에게 말하기를 천만가지 의심이 다만 하나의 의심에 있으니 화두에서 의심이 깨지면 천만가지의심이 한꺼번에 부서진다. 화두를 타파하지 못했다면 오로지 화두에 나아가 공부를 지어가라. 만약 화두를 버리고서 달리 문자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경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조사의 공안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일상의 번뇌하는 가운데서 의심을 일으키면 모두가 삿된 마구니의 권속이다.
또한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려고 하지 말고 또한 알음알이로 헤아려 재지 말고 오로지 사량할 수 없는 곳에 나아감에 뜻을 두어 사량하면 마음이 갈 바 없음이 늙은 쥐가 소뿔에 들어가면 곧 움쭉달싹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고 써 준 것이 이와 같이 분명하였는데 또한 도리어 다시 (편지를) 보내와서 어지럽게 물으니 그 많던 총명한 지견은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말한 것을 믿지 못합니까? 평생에 책을 읽은 것은 이 속에 이르러서는 한자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부득이하여 다시 그를 위하여 나쁜 냄새를 조금 피우겠습니다.
만약 단지 이렇게 그만 둔다면 도리어 내가 그에게 질문을 받고 다시 대답하지 못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 편지가 막 도착하면 곧 그에게 보내어 한 번 보게 하십시오.
거인은 스스로 말하기를 나이가 60이 되었는데 이 일을 끝내지 못했다고 하니 그에게 묻는데 밝히지 못한 것은 다시 손을 들고 발을 움직이며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에 대해 끝내지 못했습니까? 만약에 손을 들고 발을 움직임과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이라면 또한 무엇을 하려고 끝내려고 합니까? 그는 단지 이렇게 죽은 후에 단멸(斷滅)한가 단멸하지 않은가를 알고 반드시 보고자함이 곧 염라대왕 앞에 철로 된 몽둥이를 맞는 것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 의심(화두의 의심)을 타파하지 못하면 생사에 떠돌아다녀 마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그에게 말했는데 천만가지 의심이 다만 하나의 의심에 있으니 화두를 만약 타파하면 죽은 후에 단멸한가 단멸하지 않은가라는 의심도 즉시 얼음이 녹고 기와가 깨지듯 다 풀릴 것이라고 했는데 다시 바로 꺾어 분명히 단멸과 단멸하지 않음을 지시하여 판단해 달라고 물으니 이와 같은 견해는 외도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평생에 쓸데없는 것만 행하여 무엇에 쓸려고 합니까?
그는 이미 많이 먼 곳에다가 이러한 나쁜 냄새를 풍겨서 사람에게 배어들게 하니 나도 다만 이렇게 쉴 수가 없어(방관할 수가 없어) 또한 조금 나쁜 냄새를 풍겨서 그에게 배어들게 함이 옳을 것입니다.
그는 경전과 조사의 공안을 인용하지 말고 다만 눈앞에 의거해서 바로 분명히 단멸함과 단멸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지시하라고 하니 옛날에 지도(志道)선사가 혜능(慧能)대사께 묻기를 “제가 출가하면서부터 열반경을 본지가 거의 10여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큰 뜻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원하건대 스님께서는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육조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어느 곳에서 밝히지 못했는가?” 대답하기를 “제행무상(諸行無常)이 생멸법(生滅法)인데 생멸(生滅)이 이미 없어지면 적멸(寂滅)이 즐거움이 된다는 구절이 의심이 되고 미혹합니다.” 육조스님이 이르시기를 “너는 어떻게 의심하는가?” 대답하기를 “일체중생이 모두 두 가지 몸을 가지고 있으니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입이다.(이것이 곧 여거인도 똑같이 말하는 것이다) 색신은 무상하여 생(生)과 멸(滅)이 있으나 법신은 변함이 없어(常) 느끼어 아는 것이 없는데 경전에 이르시기를 생멸(生滅)이 이미 멸(滅)하면 적멸(寂滅)이 즐거움이 된다는 구절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떤 몸이 적멸이며 어떤 몸이 즐거움을 받습니까? 만약 색신이라면 색신이 없어질 때에 사대(四大)가 흩어지니 모두가 고통이니 즐겁다고 말할 수 없고 만약 법신이라면 적멸이 곧 풀, 나무, 기와, 돌과 같으니 누가 마땅히 즐거움을 받겠습니까? 또한 법성(法性)은 생멸의 바탕(體)이고 오온(五蘊)은 생멸의 작용이니 하나의 바탕과 다섯 가지 작용이 생멸이 일정하여 생(生)하면 체(體)를 따라 작용을 일으키고 멸(滅)하면 작용을 거두어 체(體)에 돌아가는데 만약 다시 생한다고 한다면 곧 유정(有情)의 무리가 단멸(斷滅)하지 않으며 만약 다시 생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적멸에 돌아가 무정(無情)의 무리와 같게 되니 이와 같다면 일체의 모든 법이 열반(涅槃)에 감금되어 오히려 생(生)할 수가 없으니 무슨 즐거움이 있겠습니까?”(마땅히 여거인과 더불어 한 문서에다 허물을 다스려야 한다)
육조스님께서는 여기에 이르러 임제(臨濟),덕산(德山)의 방식을 쓰지 않고 곧 조금 냄새를 피워서 다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처님의 제자이면서 어찌 외도의 단견과 상견을 익혀서 최상승법을 의논하려 하는가? 네가 이해한 바에 의거하면 색신 외에 별도로 법신이 있으며 생멸을 떠나서 적멸을 구하는 것이다. 또 열반상락(涅槃常樂)을 미루어 짐작하여 말하되 몸소 받는 자가 있다고 하니 이것은 곧 생사를 집착해 아껴서 세간의 즐거움을 탐착하는 것이다. 너는 지금 마땅히 알라. 일체의 미혹한 사람들이 오온이 모인 것을 알아서 본인의 모양으로 삼고 일체의 법을 분별하여 육진(六塵)의 모양으로 삼아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여 생각생각 이어져서 꿈이나 환(幻)같은 헛되고 거짓인줄을 모르고 그릇 윤회를 받아서 항상 즐거운 열반으로 도리어 고통의 모양으로 삼고 종일 (오욕의 낙을) 치달려 구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이것을 불쌍히 여기신 까닭으로 곧 보이시어 열반의 참된 즐거움은 찰나에 생하는 모양도 없고 찰나에 멸하는 모양도 없고 다시 없앨 생멸도 없다고 하셨다. (여기에 이르러 청컨대 눈여겨 보십시오.)
이러하다면 곧 생멸이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분명히 나타날 때에 또한 나타난다는 생각이 없어야 곧 항상 즐겁다고 이름하니 이 즐거움은 받는 자도 없으며, 또한 받지 않는 사람도 없다.(또한 조금 명백하다) 어찌 하나의 바탕(體)과 다섯 가지 작용(用)의 이름이 있으며 어찌 하물며 다시 열반이 모든 법을 감금하여 영원히 생(生)하지 않게 한다고 말하리요! 이것은 곧 불법을 비방하는 것이다.(여거인도 또한 (불법을 비방하는 것을) 조금 가지고 있다) 나의 게송을 들어라(시비(是非)를 낼 수 없다)
위없는 대열반이 두루 밝아 항상 고요히 비추거늘
어리석은 중생은 죽음이라고 이르며
외도는 집착하여 단멸이라고 말하며
모든 이승(二乘)을 구하는 사람은 눈으로 보고서 지을 것이 없다고 여기니
모두가 망령된 정(情)으로 헤아린 것에 속하니
육십이견(六十二見)의 근본이로다
망령되이 헛되고 거짓된 이름을 세우니
무엇을 진실한 뜻이라 하리요.(거인은 실다운 곳을 보고자 할진대 오로지 이 한 글귀를 보라)
오직 역량이 뛰어난 사람은(아직 그러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통달하여 취하고 버림이 없어(거인은 또한 30년을 의심하라)
오온법과 오온 가운데 나(我)와 (거인은 이 속에서 허다히 벗어남을 구하였으나 문이 없다)
밖으로 나타나는 모든 색상과 (허공 꽃을 보지 말라)
낱낱의 음성 모양이(사람을 속인다.)
평등하여 꿈과 허깨비 같음을 알아서 (반쯤은 구원했다)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견해를 일으키지 않고
열반의 알음알이도 일으키지 않으며(또한 그러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양변과 삼세가 끊어져 항상 모든 근(根: 六根)을 응해 쓰되 쓴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며 일체법을 분별하되 분별한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나니
겁화(劫火)가 바다 밑을 태우고 바람이 산을 때려 서로 부딪히더라도
진실로 항상 고요하고 즐거우니 열반의 모양이 이와 같다.
내가 지금 힘써 말하여 너로 하여금 삿된 견해를 버리게 하니(오직 거인만은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너는 말을 쫓아 이해하지 않는다면(거인은 기억해라)
네가 조금은 알았다고 인정하겠다.” (다만 이러한 조금도 얻을 수 없다)
지도스님이 게송을 듣고 문득 크게 깨달으니(말이 적지 않았다) 오로지 이러한 말이 곧 분명히 바로 결단내어 거인에게 지시한 손가락입니다.
거인이 이것을 보고 만약 말하되 여전히 경전에서 말한 바이고 고인(古人)의 공안을 가리킨 말이라고 하여 만약 오히려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면 지옥에 들어감이 화살을 쏜 것과 같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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