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장제형 양숙에게 답함
거사의 행하는 것이 그윽히(암암리에) 도와 더불어 합하되 다만 한번 와지( 地)함을 얻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만약 날마다 인연(경계, 사물)을 대할 때 옛 걸음(지금까지 공부해 오던 것)을 잃지 않으면 비록 한번 와지( 地)함을 얻지 못했으나 죽음이 닥쳐오면 염라대왕이 마땅히 손을 모으고 와서 고개를 숙일 것입니다.
하물며 한 생각이 서로 맞으면(깨달으면) 어떠하겠습니까!
내가 비록 목격하지는 못했으나 행한 일을 보건대 작고 큼이 알맞아서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으니 다만 이것은 곧 도가 합쳐지는 곳입니다.
이 속에 이르러서는 번뇌라는 생각도 또한 불법이라는 생각도 일으키지 마십시오.
불법이다 번뇌다 하는 것은 모두 (본분) 밖의 일입니다.
그러나 또한 밖의 일이라는 생각도 내지 마십시오.
다만 마음을 돌이켜 살펴보되 ‘이와 같은 생각(불법이니 번뇌니 하는 생각)을 일으킴이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가?’ 일을 할 때는 ‘무슨 모습을 하고 있는가?’ 행한 일을 이미 처리하고서는 ‘나의 마음과 뜻을 따라 두루 하지 않음이 없으며 모자람과 남음도 없으니 바로 이러한 때에 누구의 은혜를 받는가?’ 이와 같이 공부하면 날이 오래되고 달이 깊어지면 마치 사람이 활쏘기를 배우게 되면 (시간이 지나면) 자연 과녁을 맞히게 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중생이 전도되어 스스로 미혹케 하고 외부경계를 쫓아 조그만 욕심의 맛에 탐착하여 무량한 고통을 달게 받으니 날마다 눈뜨지 않았을 때, 침상에서 내려오지 않았을 때, 반쯤 잠에서 깼을 때 의식은 이미 어지러이 휘날려 망상을 따라 흘러 다닙니다.
선악(善惡)을 지음이 비록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침상에서 내려오지 않았을 때 천당과 지옥이 마음 가운데 있어 이미 일시에 성취되었다가 일어났을 때는 이미 제 8식(八識)에 떨어져 있게 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일체의 모든 감각기관(根)이 마음으로부터 나타난 것이며 국토와 몸 등의 곳집(藏)이 망상으로부터 펼쳐져 나타난 것이니 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고, 종자와 같고, 등불과 같고, 바람과 같고, 구름과 같아 순간 변화하니 마음이 성급히 움직임은 원숭이와 같고 더러운 곳을 좋아함은 날파리와 같고 싫증내거나 만족해함이 없음은 바람과 불과 같으며, 무시(無始)의 거짓된 습기의 씨앗은 물 긷는 도르레등과 같은 일이다.” 라고 하셨으니 이것에 대해 알면 곧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이 없는 지혜라고 부릅니다.
천당과 지옥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본인의 반쯤 깨어 아직 침상에서 내려오지 않았을 때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이지 결코 밖을 쫓아 온 것이 아닙니다.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았을 때, 잠이 깼을 때와 깨지 않았을 때 간절히 비추어 보되 비추어 돌아볼 때 또한 그것과 더불어 (일어나는 망상을) 힘을 써서 다투지 말지니 (애써 망상심을 물리치려 하지 말라) 다투면 힘을 소비하게 될 것입니다.
조사가 또한 이르시지 않았습니까! “움직임을 그쳐 그침에 돌아가게 하면 그침은 다시 더욱 움직이게 된다.” 하셨으니 비로소 일상의 번뇌 가운데 점점 힘을 드는 때가 곧 본인이 힘을 얻는 곳이며, 본인이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곳이며, 지옥을 변화시켜 천당을 만드는 곳이며, 본인이 편안히 앉는 곳이며, 생사(生死)를 벗어나는 곳이며, 시들어 피폐한 때에 피로한 백성을 일으켜 세우는 곳이며, 자손들을 덮어 감싸주는 것이니 이에 이르러야 부처와 조사를 말하고 마음과 성품을 말하고 현묘한 것을 말하고 이(理)와 사(事:차별적인 현상계)를 말하며 좋고 나쁨을 말하더라도 또한 바깥쪽의 일입니다.
이와 같은 일도 오히려 밖에 속하거늘 하물며 다시 번뇌 가운데 성인들이 꾸짖는 바의 일을 하겠습니까! 좋은 일을 함도 오히려 즐겨하지 않거늘 어찌 좋지 못한 일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만약 이렇게 말한 것을 믿는다면 영가(永嘉)선사가 이르신바 “행함도 선이요, 앉음도 선이라. 어묵동정에 몸이 편안하다.”고 하셨으니 헛된 말씀이 아닙니다.
청컨대 이것에 의지해서 실천하여 시종 바꾸지 않는다면 비록 자기의 본지풍광(本地風光)을 깨닫지 못하며 비록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밝히지 못했더라도 설은 곳(生處)은 이미 익고 익혀온 것은 이미 설게 될 것입니다.
제발 기억하십시오. 비로소 힘을 든 것을 느끼는 것이 곧 힘을 얻는 곳입니다.
내가 매번 이 가운데(공부에 뜻을 둔) 사람과 이런 이야기를 하니 종종 (내가) 자주 말하는 것을 보고 대개 소홀히 하여 그것으로 일을 삼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거사는 시험삼아 이와 같이 공부해 보십시오.
단지 십 여일(十餘日)에 곧 스스로 힘을 든 것과 힘을 들지 않은 것, 힘을 얻은 것과 힘을 얻지 않은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따뜻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아서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 아뢸 수 없습니다.
선덕(先德)께서 말씀하시기를 증득함을 말함은 다른 사람에게 보일 수 없으며 이치를 말함은 증득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고 하셨으니, 스스로 증득하며 스스로 믿고 깨달은 곳은 오직 일찍이 증득하며 일찍이 믿고 깨달은 사람이라야만 비로소 묵묵히 서로 계합하지 증득하지 못하고 믿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도 믿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이 이와 같은 경계가 있음도 믿지 못합니다.
그대는 천성적인 자질(資質)이 도에 가까워 현재 확고하여 행하는 것이 애써지 않아도 또한 쉬우니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만분(萬分) 가운데 이미 구천 구백 구십 구분(九千九百九十九分)을 덜어 버렸고 다만 문득 한 번 터져서 곧 깨달아 버림이 모자랄 뿐입니다.
사대부가 도를 배움에 대개가 착실히 이해하지 않고 말로 논(論)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곧 아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니 어찌할 바를 모름이 바로 좋은 곳임을 믿지 않고 다만 마음속에 사량하여 이름(到: 진리에 도달함)을 얻고자 하며 입으로 말하여 분명히 밝히고자 하니 전혀 잘못된 것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여래는 모든 비유로써 가지가지 일들을 말씀하셨지만 비유로써 이 법을 설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마음과 지혜의 길이 끊어져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량, 분별은 도를 방해함이 필연적임을 믿고 아십시오.
만약 앞, 뒤가 끊어짐을 얻는다면 마음과 지혜의 길이 저절로 끊어질 것입니다.
만약 마음과 지혜의 길이 끊어지면 가지가지 일들을 말함이 모두가 이 법(法)입니다.
이 법이 이미 밝아지면 곧 밝은 곳이 곧 사의(思議)할 수 없는 해탈경계이며, 단지 이러한 경계도 또한 사의할 수 없으며, 경계를 이미 사의할 수 없으면 일체의 비유도 또한 사의할 수 없으며, 가지가지의 일도 또한 사의할 수 없으며, 단지 이렇게 사의할 수 없는 것도 또한 사의할 수 없으며 이 말도 또한 둘 곳이 없으며 단지 이렇게 둘 곳 없는 곳도 또한 사의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이 계속해서 따져 가면 사(事)와 법(法), 비유와 경계 같은 것이 둥근 고리가 끝이 없는 것과 같아 일어나는 곳도 없으며 없어지는 곳도 없으니 모두가 사의할 수 없는 법이 됩니다. 그러한 까닭으로 이르되 “보살이 이렇게 사의하지 않는 곳에 머물러 그 속에서 사의함이 끝이 없다.
이 사의할 수 없는 곳에 들어오면 생각과 생각하지 않음이 모두 적멸(寂滅)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적멸한 곳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하니 만약 적멸한 곳에 머물러 있다면 법계량(法界量)의 간섭을 받게 됩니다.
경전에서는 그것을 일러 법진번뇌(法塵煩惱)라고 하니 법계량(法界量)를 멸(滅)해 버리고 가지가지의 수승함을 한 번에 없애고 바야흐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와 <마삼근(麻三斤)>, <건시궐(乾屎橛)>,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일구흡진서강수(一口吸盡西江水)>,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등의 화두를 잘 들어보십시오.
문득 한 언구(一句)를 투과하면 비로소 그것을 일러 법계무량회향(法界無量回向)이라고 합니다.
여실(如實)히 보며 여실히 행하며 여실히 써서 곧 한 털 끝에 불국토를 드러내며 미세한 티끌 속에 앉아서 대법륜(大法輪)을 굴리게 됩니다.
가지가지 법을 성취하며 가지가지 법을 파괴함이 모두가 나로 말미암은 것인데 장사(壯士)가 팔을 뻗음에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사자(獅子)가 돌아다님에 짝을 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갖가지 수승하고 묘한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마음에 놀라지 않으며 갖가지 악업의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일상생활 가운데 인연을 따라 뜻대로 자재(自在)하며 성품을 따라 유유자적하니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천당, 지옥이 없다는 일을 말할 수 있습니다.
영가(永嘉)선사께서는 “또한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다. 대천(大千)의 모래 같은 세계는 바다 가운데 거품이요, 모든 성현(聖賢)들은 번개가 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만약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말을 잘못 아는 사람이 매우 많으니 진실로 근원을 뚫지 못하면 말을 의지해 알음알이를 냄을 면치 못하여 곧 말하되 일체가 다 없다.
인과를 무시하여 없다고 하고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말씀하신 언교(言敎)가 다 거짓이라고 하니 그것을 일러 다른 사람들을 미치게 하고 미혹케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병을 없애지 못한다면 곧 한없이 재앙을 부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허망하게 들뜬 마음이 모든 계교(計巧)스러운 견해가 많다.”고 하셨으니 만약 유(有)에 집착하지 않으면 곧 무(無)에 집착하고 만약 이 두 가지에 집착하지 않으면 곧 유, 무(有無)의 사이에 사량하며 헤아리며 비록 이 병을 알았으나 반드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곳에 이르러 있으니 때문에 선성(先聖)이 입이 아프도록 정성스럽게 말씀하시어 사구(四句)를 버리고 모든 잘못된 것을 끊게 하시어 바로 한 칼에 두 동강을 내어 다시 앞, 뒤를 생각하지 않고 모든 성인의 머리를 끊게 하셨습니다.
사구(四句)는 곧 有, 無, 非有, 非無, 亦有亦無가 이것입니다.
만약 이 사구(四句)를 투과하면 일체 모든 법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을 보고 나 또한 따라 그와 함께 있다고 말하더라도 또한 실제로 있다는 것에 장애를 입지 않으며 일체 모든 법이 실제는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을 보고 내가 또한 따라서 그와 더불어 없다고 말하더라도 또한 세상의 공허한 무(無)가 아니며 일체법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내 또한 따라서 그와 더불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말하더라도 또한 허황된 이론이 아니며 일체 모든 법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나 또한 따라서 그와 더불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하더라도 또한 서로 어긋난 것이 아닙니다.
유마거사가 말씀하신 “외도육사(外道六師)가 떨어진 바에 너 또한 따라 떨어져라.” 는 것이 이것입니다.
사대부가 도를 배움에 대개 마음을 비워버리고 선지식께서 지시함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선지식이 막 입을 열면 그는 이미 말 앞에 있어서 한번에 알았다가도 그로 하여금 토로(吐露)케 하면 모두가 한번에 잘못 아니 바로 말 이전에 알아버린 것이 말에 걸려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어떤 한 종류는 한결같이 총명을 내어 도리를 말하여 세간의 갖가지 재주는 내가 알지 못함이 없으나 다만 선(禪)이란 한 가지는 내가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하며 관직에 임(臨)하는 곳에서 몇 명의 엉터리 장로들을 불러다가 한 끼 식사를 대접하여 먹이고는 그들로 하여금 방자한 뜻으로 어지럽게 말하게 하고 곧 심의식(心意識)으로 엉터리로 이야기한 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도리어 사람들을 감정하되 한 구절씩 주고받는 것으로 선(禪)을 겨룬다고 말하며 끝에 내가 한 구절이 많고 다른 사람이 말이 없을 때 곧 내가 마땅함을 얻었다고 하다가도 참된 눈 밝은 사람을 만나면 또한 도리어 알지 못하며 비록 알았더라도 또한 확고한 믿음이 없어서 사지를 땅에 내려놓고 선지식에게 나아가 깨달으려 하지 않고 예전대로 인가(印可)를 구하려 하다가 선지식이 역순의 경계 가운데 본분감추(本分鉗鎚)를 보이면 또한 도리어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으니 이런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이라고 이름하겠습니다.
그대는 어린 나이에 높은 벼슬에 올라 집을 일으키고 사는 곳에서 때를 따라 이익된 일을 행하며 문장과 사업 모두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으나 일찍이 스스로 자랑하지 않고 한 마음 한 뜻으로 다만 물러나 이 일대사인연을 착실히 이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대의 지극한 정성을 보았기에 나도 모르게 이와 같이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단지 그대가 이러한 병을 알게 하고자 할뿐만 아니라 또한 처음 마음을 낸 보살도를 닦는 사람을 격려하여 도에 들어가는 양식으로 삼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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