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유보학 언수에게 답함

 

오늘따라 찌는 듯이 더우니 집에 있으면서 편안하며 뜻과 같이 자재(自在)하여 모든 마장(魔障)에 흔들림이 없습니까?

생활하는 가운데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가 일여(一如)합니까?

동정(動靜) 가운데 분별하지는 않습니까?

꿈을 꾸는 것과 꿈에서 깨어남이 일치합니까?

이(理)와 사(事)가 합치합니까?

마음과 경계가 모두 한결같습니까?

방거사는 “마음이 여여(如如)하면 경계 또한 여여하여 실다움도 또한 허황함도 없다.

유(有)에도 관계되지 않고 무(無)에도 걸림이 없으면 성현이 아니라 일을 마친 범부(凡夫)다.”라고 이르셨습니다.

만약 진실로 일을 마친 범부가 되었다면 부처님과 달마는 무엇인고? 진흙과 흙덩어리입니다. 3승12분교는 무엇인가? 끓는 사발의 우는 소리입니다.

그대가 이미 이 문중에 스스로 믿어 의심하지 않으니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생소한 것은 놓아 익게 하고 익은 곳은 놓아 생소하게 하여야 비로소 이 일과 더불어 약간 상응(相應)함이 있을 것입니다.

종종 사대부가 대개 뜻과 같지 않을 때에 언뜻 본 곳을 얻었다가 도리어 여의(如意)한 중에 잃어버리니 그대로 하여금 알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의한 가운데에 마땅히 항상 여의하지 않았을 때를 마음에 두고 잠시도 잊지 마십시오.

다만 근본을 얻을 것이지 말단적인 것은 근심하지 마십시오.

다만 부처가 되는 것만 알뿐이지 부처가 말을 설명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마십시오.

이 한마음은 얻기는 쉬우나 지키기가 어려우니 절대로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마땅히 처음과 끝을 바로 하여 넓혀 채운 뒤에 자기의 나머지를 미루어 다른 것에 미치게 해야 합니다.

그대의 얻은 것이 한 구석에 머물러 있지 않으니 아마도 일상의 가운데 마음을 일으켜 모든 현상을 낱낱이 세밀하게 관찰하거나 마음을 메마르게 하여 생각을 없게 함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근래에 선(禪)과 불법(佛法)이 매우 쇠퇴하여 어떤 엉터리 장로(長老)는 근본을 스스로 깨달은 바 없으면서 업식(業識)이 아득하여 의지할만한 근본이 없고 실제의 기량(伎倆)도 없으면서 배우는 자를 모아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와 같이하여 깜깜해 옻을 칠한 것과 같이 눈을 꼭 닫아버리고 묵묵히 항상 비추어보라고 부르짖으니 언충(彦冲)이 이러한 무리의 가르침에 무너짐을 당했으니 매우 가슴 아픕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만약 그대가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를 깨치지 않았다면 나도 또한 설할 곳이 없을 것입니다.

제발 안면을 몰수하고 간절히 수단을 베풀어 이 사람을 구해 내십시오. 지극히 빌고 빕니다. 그런데 한 가지 사실이 있으니 또한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언충은 청정하게 스스로 머물러 세간의 맛이 담박한지가 몇 년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에 집착하여 기특하다고 여기니 만약 그를 구하고자 할진대 마땅히 그에게 동사(同事)를 베풀어 그로 하여금 환희(歡喜)케 하여 마음에 의혹이 생기지 않게 해야 거의 믿고 생각을 돌리려고 할 것이니, 유마(維摩)거사가 이르신바 “먼저 하고자 하는 것으로 끌어들이고 뒤에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가게 한다.”함이 이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법의 앞뒤를 관찰하여 지혜로써 분별하며 옳고 그름을 살펴서 결정해 법인(法印)을 어기지 말고 차례대로 수많은 수행의 문(無邊行門)을 건립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의 의심을 끊게 하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곧 중생을 위해 법칙을 만든 것이며 만세(萬世)의 모범인 것입니다.

하물며 이 사람은(此公: 언충을 가리킴)은 근성이 그대와 더불어 아득하여 같지 않으니 천상에 태어남은 진실로 영운(靈運)보다 앞에 있으나 부처가 됨은 분명히 영운보다 뒤에 있습니다.

이 사람은 결코 지혜로써 포용할 수 없고 마땅히 좋아하는 바를 따라서 포용해야 하니 날과 달로 탁마한다면 아마도 스스로 그릇됨을 알고 문득 버리고자함은 또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생각을 돌이키려 한다면 또한 이것은 역량(力量)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대도 마땅히 한걸음 물러나 그로 하여금 한 번 벗어나게 해야 비로소 옳을 것입니다.

근래 위(暐)수좌가 그(언충)가 자암노자(紫巖老子)에게 답한 편지 하나를 베껴서 돌아 왔거늘 내가 한번 읽고 수희(隨喜)하였고 여러 날 찬탄하고 기뻐하였으니 바로 문장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의 대의(大義)를 보여주고 마지막에 그것과 더불어 답을 하였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옛날에 달마대사가 혜가(慧可)스님에게 “너는 다만 밖으로 모든 반연(攀緣)을 쉬고 안으로 마음의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지 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혜가스님이 가지가지로 마음을 말하고 성품을 말했으나 모두 계합하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홀연히 달마가 보인 바의 요긴한 법문을 깨닫고 곧 달마대사께 사뢰어 말하되 “제가 이번에 비로소 모든 반연을 쉬었습니다.” 달마대사는 그가 이미 깨달은 것을 아시고는 다시 깊이 캐묻지 않고 다만 이르시되 "아마도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이룬 것이 아닌가?”"아닙니다.”"그대는 어떠한고?”"분명히 항상 알기 때문에 말이 미칠 수가 없습니다.”달마대사께서 이르시되 “이것이 곧 위로부터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마음을 전한 요체이니 너는 지금 이미 얻었으니 다시 의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언충이 이르되 “밤에 꿈을 꾸고 낮에 생각함이 십여 년이 흘렀건만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했습니다. 고요하고 묵묵히 단정히 앉아 그 마음을 한결같이 비워서 생각이 끄달림이 없게 하며 경계가 들러붙는 바 없게 하여 자못 경쾌하고 편안함을 느낍니다.”라고 하니 읽다가 여기에 이르러 나도 모르게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생각이 끄달림이 없음이 어찌 달마께서 이르신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다는 것이 아니며, 경계가 들러붙는 바 없다는 것이 어찌 달마께서 말씀하신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쉰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혜가대사도 처음에 달마께서 보이신 방편을 알지 못하고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을 가지고 마음과 성품을 이야기할 수 있으며 도리를 설할 수 있다고 하며 문자를 끌어서 증거를 대어 인가(印可)를 구하고자 하니 그런 까닭으로 달마께서 낱낱이 찢어버리시어 마음 쓸 곳을 없애고야 비로소 물러나서 마음이 담벽(墻壁)과 같다는 말은 달마의 실법이 아님을 알고 문득 장벽위에 문득 모든 반연을 쉬니 즉시 달을 보고 손가락을 잊고 곧 분명히 항상 알기 때문에 말이 미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도 또한 때에 닥쳐 달마대사의 닥달해 냄을 입은 소식이라, 또한 혜가의 실법(實法)이 아닙니다.

알지 못하는 장로들이 이미 스스로 증득한 바 없으면서 곧 쫓아다니면서 날조(捏造)하여 모으고는 비록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쉬게 하나, 그 스스로 마음의 불꽃이 활활 타올라 밤낮으로 멈추지 않음이 마치 봄, 가을로 낼 세금이 모자란 백성과도 같습니다.

언충은 도리어 허다하게 힘을 소비함은 없으나 단지 독을 맞음이 깊어서 오로지 밖으로 어지럽게 달려서 동정(動靜)을 말하고 어묵(語黙)을 말하며 득실(得失)을 말하며 다시 주역(周易)과 불경(佛經)을 끌어다가 억지로 끼워 맞추어 이해하니 진실로 쓸데없는 일을 하여 무명(無明)을 기르고 있습니다.

생사(生死)를 끊는 화두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일찍이 맺어 해결하지 못한다면 죽음이 닥쳐왔을 때 어떻게 절충하겠습니까?

눈빛이 떨어지려고 할 때에 또 염라대왕에게 말하되 제가 정신이 맑아지고 생각이 조금 안정될 때를 기다려 다시 가서 당신을 뵙겠습니다라고 말할 수가 없으니,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때는 종횡(縱橫)으로 걸림이 없는 말도 또한 소용이 없으며 마음이 나무와 돌 같아도 또한 소용이 없습니다.

마땅히 본인의 생사심(生死心)을 부수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만약 생사심을 부수면 다시 무엇하러 정신을 맑게 하고 생각을 안정되게 함을 말하며, 다시 무엇하러 종횡으로 걸림이 없게 말하며 다시 무엇하러 내전(內典), 외전(外典)을 말하리요.

하나를 요달(了達)하면 일체를 요달하며 하나를 증득(證得)하면 일체를 증득하게 됩니다.

마치 한 타래의 묶여진 실을 끊을 때에 한번 자르면 한꺼번에 끊어지는 것과 같아 끝없는 법문을 증득함도 또한 그러하여 다시 차례(次第)가 없습니다.

그대가 이미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화두를 깨달았으니 또한 이와 같음을 얻었습니까? 바로 마땅히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옳습니다.

만약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이 법문을 통해 대비심(大悲心)을 일으키고 역순(逆順)의 경계에 진흙을 묻히고 물을 묻혀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구업을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것을 건져내어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함이 비로소 대장부의 할 일입니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옳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언충이 공자(孔子)가 일컬은 ‘주역(周易)의 도의 작용이 자주 옮긴다’를 이끌어서 경전 중에 ‘마땅히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는 것과 같다고 이해하며 또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음을 끌어다가 흙과 나무와 다름이 없다고 하니 이것은 더욱 가소로운 것입니다.

그에게 말하는데 무간(無間)의 업(業)을 부르지 않고자 한다면 부처님의 바른 법륜(法輪)을 비방하지 마십시오.

경전에 이르기를 마땅히 색(色)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마땅히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라고 하시니 이 광대하고 적멸한 오묘한 마음은 색으로 볼 수도 소리로도 구할 수 없습니다.

응무소주(應無所住)는 이 마음이 실체(實體)가 없음을 말한 것이고 이생기심(而生其心)은 이 마음은 진리를 떠나 설 곳이 없으며 설 곳이 곧 진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공자가 일컬은 ‘주역의 도의 작용이 자주 옮긴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루(屢)는 자주라는 뜻이고 천(遷)은 바꾼다는 뜻입니다.

길흉회린(吉凶悔悋)은 움직임에서 생기니 루천(屢遷)의 뜻은 상도(常道)에 돌아와 합쳐진다는 것인데, 어찌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과 합쳐서 한 덩어리를 이룰 수 있으리요. 언충은 불교의 뜻을 모를 뿐 아니라 또한 공자의 뜻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대는 공자의 가르침에 자재(自在)함이 정원을 노니는 것과 같으며 또한 불교에 대해서도 깊이 문지방에 들어왔으니 나의 이와 같은 억척(杜撰)이 옳습니까? 규봉(圭峯)선사가 이르시되 “원(元), 형(亨), 이(利), 정(貞)은 하늘의 덕이니 한 기운에서 시작되고 상(常), 낙(樂), 아(我), 정(淨)은 부처님의 덕이니 한 마음에서 비롯한다. 한 기운을 오로지 하여 부드러움을 이루고 한 마음을 닦아서 도를 이룬다.”고 하셨으니 규봉(圭峯)스님의 이와 같은 이해라야 비로소 유교와 불교의 두 가지 가르침에 치우침이 없으며 남은 한이 없을 것인데 언충이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으로 역지루천(易之屢遷)의 뜻과 같다함은 감히 허락하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언충의 억지로 끼워 맞춤에 의거한다면 공자와 부처님에게 신속히 짚신을 사서 신겨야지 비로소 옳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은 자주 옮기고 한 사람은 머무르는 바 없으니 아마도 읽다가 여기에 이르면 반드시 배를 잡고 웃을 것입니다.

Posted by 붓다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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