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부추밀 계신에게 답함(1)

 

편지를 받으니 어릴 때에 이 도(참선 공부)를 알아 신심을 가지고 마음을 기울였다가 만년(晩年)에 알음알이에 장애 되어 깨달아 들 곳을 구하지 못하여 날마다 도를 체득할 방편을 알고자 한다고 하니 이미 지극한 정성을 가지고 있으니 감히 스스로 외면하지 못하여 항목에 의거하여 결론을 내려 말을 조금하겠습니다.

오직 이렇게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곧 도를 방해하는 알음알이니 다시 달리 무슨 알음알이가 있어 그대에게 방해를 할 것이며 필경에는 무엇을 불러 알음알이라고 하며 알음알이는 어디를 따라 이르며 방해를 당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오직 당신이 (앞에서) 말한 이 한 구절은 뒤바뀐 것이 3가지 있으니 스스로 알음알이에 장애된 바가 되었다는 것이 하나요,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하여 미혹한 사람이라고 달게 여김이 하나요, 다시 미혹한 속에 있으면서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림이 하나입니다.

오직 이 3가지 전도(顚倒)됨은 곧 생사(生死)의 근본입니다. 바로 마땅히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아 전도된 마음이 끊어지면 바야흐로 파괴해야할 미혹이 없으며 기다릴만한 깨달음도 없으며 방해할 알음알이도 없음을 알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뜨거운 것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아 오래오래 하다보면 자연히 이러한 생각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알음알이를 아는 마음에 나아가서 보십시오.

아직도 장애가 됩니까? 알음알이를 아는 마음에 여전히 허다한 것들이 있습니까?

옛날부터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은 모두 알음알이로 친구로 삼고 알음알이로 방편으로 삼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알음알이 상에서 평등의 자비를 행했고 알음알이 상에 모든 불사(佛事)를 했는데 용이 물을 얻은 것과 같고 호랑이가 산에 의지한 것과 같았으니 결국 이것으로 번뇌를 삼지 않았으니 다만 그들은 지혜가 일어나는 곳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일어나는 곳을 알았으니 바로 이 알음알이가 곧 해탈(解脫)의 도량이며 바로 생사를 벗어나는 곳이며 이미 해탈의 장(場)이며 생사를 벗어나는 곳일진대 알음알이 내는 곳이 바로 적멸(寂滅)이며 알음알이 하는 곳이 이미 적멸인데 알음알인줄 아는 자는 적멸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니 보리열반과 진여불성도 적멸 아닐 수가 없으니 곧 어떤 것이 장애가 될 수 있으며 다시 어느 곳에 깨달아 들어감을 구하리요?

부처님께서 “모든 업은 마음을 따라 생기니 때문에 마음이 환(幻)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이 분별을 여의면 모든 집착이 사라집니다.

어떤 스님이 대주(大珠)화상에게 여쭙기를 “어떤 것이 대열반입니까?” 대주스님께서 이르되 “생사의 업을 짓지 않는 것이 대열반이다.” 그 스님이 묻기를 “어떤 것이 생사의 업입니까?” 대주스님께서 “대열반을 구함이 생사의 업이다.”고 하셨습니다.

고덕(古德)은 “도를 배우는 사람이 한 생각에 생사를 헤아리면 곧 마도(魔道)에 떨어지며 한 생각에 모든 견해를 일으키면 곧 외도(外道)에 떨어진다.”라고 이르셨으며 또 유마거사는 “모든 마(魔)라는 것은 생사를 즐기는 것이다.

보살은 생사에 대해 버리지 아니하고 외도는 모든 견해를 즐기지만은 보살은 모든 견해에 대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곧 알음알이로써 친구를 삼는 것이며 알음알이로 방편을 삼고 알음알이에서 평등의 자비를 행하고 알음알이에서 모든 불사를 한 본보기입니다. 다만 그는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이 공(空)함을 깨달아 생사열반이 모두 적정(寂靜)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이상 절대로 삿된 승려들이 어지럽게 말하는데 꾀여 마의 굴속에 끌려 들어가 눈을 감고 망상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요즘 조사의 도가 쇠퇴하여 이러한 무리들이 마(麻)와 조(粟)와 같이 많으니 진실로 한 맹인이 여러 맹인을 이끌고 서로 불구덩이에 끌고 가는 격이니 매우 불쌍하고 근심스럽습니다.

원컨대 그대는 척량골을 꼿꼿이 세워 이러한 행동을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행위를 하는 것은 비록 잠시 냄새나는 가죽주머니에 얽매여 있으면서 곧 구경을 삼으나 마음이 어지러이 날뜀은 마치 아지랑이와 같아 비록 6식이 잠시 정지해 있으나 돌이 풀을 누르고 있는 것과 같아 어느새 또 생기니 무상보리를 취하여 구경의 안락처에 이르고자 함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내가 또한 일찍이 이러한 무리의 속임을 당하여 후에 만약 참 선지식을 만나지 않았다면 거의 헛되이 일생을 지나칠 뻔했습니다.

매일 생각해 보니 곧 참을 수가 없어 이 때문에 구업(口業)을 아끼지 아니하고 힘써 이러한 폐단을 구제하니 지금 점점 잘못됨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 바로 끊어 깨닫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한 생각을 문득 부수어야 비로소 생사를 깨달을 것이니 비로소 깨달았다고 이름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마음을 두어 부수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만약 마음을 부수어진 곳에 둔다면 영겁토록 부술 때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망상 전도된 마음과 사량하고 분별하는 마음과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마음과 지견(知見)으로 알려는 마음과 고요함을 좋아하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마음을 한꺼번에 놓고 다만 눌러 놓은 곳에서 화두를 들되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묻기를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없느니라.> 이 한 자(無)는 곧 허다한 나쁜 지견과 나쁜 앎을 꺾는 무기입니다.

불성이 있다, 없다의 알음알이를 짓지 말고 도리(道理)가 있다는 알음알이도 일으키지 말고 의식(意根)에서 사량하여 헤아리지 말며 선사가 눈썹을 치켜 올리고 눈을 깜박이는 곳에서 머물지 말고 말에서 살림살이를 짓지 말고 다 날려 버리고 일 없는 가죽주머니 속에 있지 말고 (선지식이 공안을)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려고 하지 말며 문자 가운데 끌어들여 증거로 삼지 말고 오로지 하루 종일 사위의 가운데 항상 들며 항상 들고 뚜렷이 하되,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를 일상에서 여의지 말고 시험 삼아 이와 같이 공부를 해 본다면 어느 날에 곧 스스로 보게 되리니 한 고을의 천리의 일이 전부 방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고인이 “나의 이 속은 살아있는 조사의 뜻이니 어떤 물건이 그것을 구속하여 잡아 둘 수 있겠는가?” 하셨으니 만약 일상을 버리고 달리 나아가 향한다면 이것은 파도를 버리고 물을 구하는 것이며 그릇을 버리고 금을 구하는 것이니 구할수록 더욱 멀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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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붓다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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