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주인공

(대행스님)


발전소에서 내 집 전등에 이르도록 전선을 가설해 놓고서 스위치를 올리자 불이 들어오듯이 나의 마음은 한마음과 연결되어 있어 그 근본이 다르지 않으니 나의 근본이 곧 만법의 근본이라, 이름하여 주인공이라 한다. <그러나 주인공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생각하고 움직이고 말했을 때 벌써 근본 자리에서 알고 있으니 그래서 참 부처요, 자성불이요, 참 보배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주인공이란 영원한 자기의 실상이다. 영원한 생명의 실상이다.

주인공은 생명의 근본이다. 그 영원한 생명의 근본은 우주와 직결되어 있고 이 세상 만물과도 가설이 되어 있어서 일체는 다 같이 공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근본의 주인공은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 영원히 돌아가는 자가 발전소와 같아서 항상 안으로 불이 켜져 있기 때문에 켜졌다, 꺼졌다 하는 말조차 붙지를 않는다.

주인공이란 생각나기 이전의 마음 중심, 바로 나의 기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개별적인 기둥이 아니라 전체적인 기둥이다. <전체적인 기둥이므로 무엇이든 한 생각 내는 대로, 불을 켜려면 켜고 밥을 지으려면 짓고 모터를 돌리려면 돌리고 하는 식으로 다양하게 끌어 쓸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자동적으로 할 수 있다. 마치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듯이, 무심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 마음의 기둥, 그것은 바로 적멸보궁 전체 우주를 싸고 돌리는 기둥과 같다. 맷돌에 심봉이 있어 아래 위가 맞물려 돌아가며 곡식을 갈아내듯이 우리 마음의 기둥이 심봉이 되어 우주 전체가 돌아간다.

주인공은 진리요, 빛이며 영원이요, 생명이며 부처요 보살이며 청정하며 긍정이다. 거기에는 어둠도 없고 죽음도 없고 더러움도 없고 부정도 없다. 주인공은 진리이니 빛보다 더 밝고, 진리이니 행복보다 더 기쁘며, 진리이니 허공같이 크고 영원하며, 진리이니 텅 비고 고요하여 자취도 없다.

주인공! 하면 거기엔 지렁이의 생명도 포함되고 올챙이의 생명도 포함된다. 일체의 생명이 다 포섭된다. 물의 생명도 포섭되고 불의 생명도 포섭되고 돌의 생명, 흙의 생명도 다 포섭된다. 주인공은 일체 만물 만법의 원소이며 핵이며 에너지이다.


주인공은 밝고 영원하고 지극하다. 그 주인공은 천지가 생기기 이전에도 있었고 설사 우주가 무너지고 허공이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사라지거나 죽지 않는다. <그런 주인공을 일컬어 ?한마음?이라고도 하는데 그 한마음은 말이나 생각에는 잡히지 않을 만큼 미묘 불가사의하다.>

주인공을 불성이라고도 하고, 자성이라고도 하고, 또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바로 이 주인공이 있음으로써 중생은 노예에서 벗어나 참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모든 것을 다 쉬고 맡기게 되면 대자유를 누리게 되는 이치도 주인공 그가 본래 자유스럽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텅 비어 걸릴 것이 없다.>

주인공은 본디 태어나는 일도 없고 죽는 일도 없다. 주인공은 육안으로 볼 수 없고 생각으로 잡히지 않지만 영원하고 크나큰 나이다. 위대한 지혜의 빛나는 힘이 있고 청정하여 변함이 없다. 또한 헤아릴 수 없는 능력을 갖춘 나이다. 중생은 모습이 다르고 이름이 다르고 차원이 다르고 나고 죽고 하지만 주인공은 다만 하나가 만 개로, 만 개가 하나로 도는 가운데 여여하니 이를 일컬어 또한 부처, 자성불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을 통해 중생과 부처가 만나고, 둘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나의 근원이지만 동시에 모든 것의 근원이다. 주인공은 나의 주인이자 모두의 주인이요, 삼계의 주인이다. ?주? 한 것은 근본 자리를 말하고 ?공? 한 것은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주인공 자리엔 무엇 하나를 고정되게 세워서 ?나?라고 할 수도 없고 무엇 하나를 세워서 활용이라 할 수도 없고 무엇 하나를 세워서 부처라 할 수도 없고, 무엇 하나를 세워서 늙은이다 젊은이다, 여자다 남자다, 아비다 자식이다 라고 할 수도 없다.


나의 시작이자 끝

중생은 본래 성품인 주인공에 근거해서 존재한다. 비유하자면 나무가 땅속의 뿌리를 근거로 하는 것과 같다. 또 비유하자면 허공은 영원토록 결코 무너지는 일도 없고 다시 생겨나는 일도 없고 육안으로 잡히지도 않는데 그 속에서 바람이 불고 구름이 일어나며, 또 바람 그치고 구름 스러지듯이 중생은 주인공에 근거한다.

나무에 비유하여 내가 열매라면 주인공은 열매를 있게 한 꼭지와 같고, 내가 꼭지라면 주인공은 그 꼭지가 매달린 가지와 같으며, 내가 가지라면 주인공은 그 가지가 돋아나온 줄기와 같다. 내가 줄기라면 주인공은 비유하건데 뿌리와 같으니 뿌리는 나무가 있게 된 근본이라 그로부터 줄기와 가지와 잎과 열매가 나왔 듯이 나의 모든 생각, 나의 모든 활동, 나의 모든 공덕이 그 주인공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한 것이 없다. <주인공은 나의 참된 근본이다. 내 몸, 내 생각은 돋아났다가 곧 스러지는 가지?잎과 같으니 뿌리는 가지와 잎이 떨어지고 꺾이면 새로운 가지와 잎을 돋게 하듯이 주인공도 그러하다.>

그렇다고 나의 주인공이 나무의 뿌리처럼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또 육안으로 보여지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부처님께서 이르시기를, 만약 모양이나 음성으로써 부처를 구한다면 필경 여래를 볼 수 없다 하였으니 눈 아닌 눈으로 보아야 한다. 주인공은 차라리 뿌리 없는 나무라 할 것이며 한 점 찍어서 맛볼 수도 없는 허공같이 형상과 감각을 초월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은 나의 진정한 면모로서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에 자재로운 나의 참 주인이자 이 세계의 참 주인이다. <일컬어 자성이라고도 하고, 본래면목이라고도 하고, 불성이라고도 하고, 여래장, 진여, 참 나라고도 하며 주인공이라고도 하는 이 나는, 중생이 흔히 나라고 생각하는 그것과는 천양지차로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은 광대하고 적적하면서도 그 신령함이 내 안에 남김 없이 깃들어 있다. 그러므로 주인공은 크다 하면 삼라 대천 세계에 차고도 남고 작다 하면 티끌보다도 작다. 그리하여 나는 거대한 주인공의 품에 싸여 있고, 내 안의 작은 불씨 하나는 거꾸로 온 우주를 포함하고 있다.

주인공은 나의 시작이며 끝이요, 나의 궁극이며 목적이다. 나를 있게 한 이도 주인공이며 나를 데려갈 이도 주인공이다. 나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도 주인공이며, 나를 그 곤경에서 구해 주는 것도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내 속의 나? 또는 ?참나?라고 말할 수 있다.

수억겁 전부터 우리는 모습을 이렇게 바꾸고 저렇게 바꾸고 여기로 왔다가 저기로 갔다가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는데 나를 끌고 온 주처는 과연 누구인가? 다름아닌 주인공이다. <우리는 여지껏 수억겁을 거쳐 내려오면서 한번도 죽어본 일이 없다.>

나를 형성시킨 것도 주인공이고 이끌고 가는 것도 주인공이다. 수억겁 진화의 길을 끌고 온 근본이 주인공이다. 지금 자기 육신을 끌고 가는 것도 주인공이다. 인간의 뿌리는 체가 없어 보이지 않으나 마음 내고 말하고 보고 듣고 걷는 일체의 행동을 하게 하는 것도 주인공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이란 자기 육신이라는 배에다 몸 속의 온갖 중생들을 싣고 다니는 선장과 같다.>

무한자재권

모든 사생의 일체, 만물 만생의 근본이 하나로 뭉쳐서 시공 없이 돌아가는 그 자체를 한마음이라 하니 내 한마음 주인공은 전체로 가설된 자가 발전소와 같아 무한량의 에너지가 주어져 있다. <그 에너지야말로 내 몸이 아프면 의사가 되어 주기도 하고 약사 보살이 되기도 하며 지장 보살이 되어 내 명을 이었다 붙였다 할 수 있다.>

주인공은 자재권을 가졌으므로 삼천 대천 세계의 어느 것이든 내가 아니 되는 것이 없고 일체 생물이 다 될 수 있으며, 살아 있는 것만이 아니라 죽은 세상에도 내 자리 아닌 게 없듯 유무가 합쳐진 자리인 것이다. 주인공은 내 속에 갖춰져 있으면서 법계에 충만하여 아니 미치는 데가 없다.

지구상에 있는 온갖 진귀한 보배를 다 합쳐도 바꿀 수 없는, 무한히 값진 진리가 곧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다. <그렇거늘 그렇게 무한한 보배를 갖고서도 이것 저것 걱정이 많다. 그것은 마치 억만장자가 당장의 끼니를 걱정하는 것과 같다.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주인공은 광대 무변한 불법의 뜻을 그대로 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수억겁을 거쳐 나왔기에 그 경험을 살려 이끌어 갈 수도 있고 자유인이 되게 할 수도 있다. 주인공은 천백억 화신으로 공존한다. 주인공 속엔 역대의 일체 부처님이 들어 계실 뿐 아니라 일체 중생이 다 같이 들어 있다.

주인공은 우주 천체, 태양계의 혹성들과도 마음이 직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수억겁을 거쳐 물질적으로 되나오고 또 되나오며 인간으로 진화하면서 살아온 습성도 거기서만 해결할 수 있다. <주인공은 마치 업의 용광로와 같다.>

한마음 주인공만이 나를 이끌어 줄 수 있고 과거의 업을 녹여 줄 수 있고 위로는 부모, 조상의 묵은 빚을 갚아 줄 수 있고 아래로는 자녀들에게 햇빛을 비춰 줄 수 있다. 주인공만이 그런 능력을 줄 수 있다.

주인공은 거대한 용광로이다. 이 보이는 세계와 더불어 함께하는 일체 제불의 보이지 않는 절실한 대원력이 언제나 함께하는 용광로이다. 그러한 용광로가 내 속에 있다. 어떤 쇠든지 용광로에 들어가면 다 녹아 내리듯 그 어떤 눈물도 자비로 화하고, 그 어떤 아픔도 감사의 염으로 되살아나게 하는 용광로가 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어떤 업도, 어떤 환난도 그 앞에서는 한 점 눈송이일 뿐이니 주인공은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의 신묘한 비밀이요 모든 생명이 갖고 있는 불성으로서의 불가사의한 힘이다. 그것이 바로 주인공의 위덕이다.

주인공은 무한량의 에너지, 무한량의 능력일 뿐 쓰고 안 쓰고 하는 것은 중생의 마음이 하기 나름이다. <그러므로 중생심을 끊고 참 나를 얻는 게 아니라 도리가 그러함을 발견함으로써 거짓의 나 또한 참 나의 한 나툼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은 금강 같고 여여하고 원만하고 달처럼 해맑고 태양처럼 밝고 맑다. <그런 자성이 누구에게나 들어 있건만 온갖 대상, 제멋대로의 상념이나 견해, 욕망 따위에 끄달리고 얽매이니 중생은 마치 항아리 속에 불을 켜 놓은 것과 같다. 스스로 불 켜 있는 줄도 모르고 밖을 비추지도 못한다.>

나 없는 참 나, 주인공에겐 길 아닌 데가 없어 산도 길이요 들도 길이요 허공도 길이요 길이 없는데도 길이니 어느 한구석 손 안 닿는 데가 없고 발 안 닿는 데가 없다. 그래서 평발이요 평손이다. <부처님의 발을 평발, 평편족이라 하는 것은 아니 닿는 데 없기에 그렇다. 주인공은 만법의 근원이기에 평발이다.>

인간을 보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한 것은 참 자기, 주인공이 무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모든 재료가 다 갖춰져 있다는 사실, 여여하고, 청정하고, 자유 자재할 수 있다는 사실,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낼 수 있는 근본이 갖춰져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말로는 만물의 영장이라 하면서도 소견을 적게 쓰고, 따로따로 가르기를 일삼으니 지혜가 넓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꿈이다 생시다, 시간이다 공간이다, 생사다 윤회다 하는 말이 붙지 않는 자리, 그 자리에서 그대로 여여하게 내가 나를 이끌어 가며 상신하고 하달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누구에게나 갖춰져 있다. <누구나 지금 지장 행을 하고 있고, 누구나 지금 관세음의 32응신을 하고 있다. 누구나 본래 그러한데 다만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한정된 자기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다.>

태양은 내 빛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지붕 없고 벽이 없으면 태양은 그대로 비춰 준다. 주인공도 그러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동차를 몰고 갈 때에 운전하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든, 착하든 그렇지 않든간에, 또 차를 몰고 가는 목적이 무엇이든간에 엔진에 기름이 공급되듯이 참 나는 가화합의 나에게 에너지를 줄 뿐이지 따로이 있어서 가고 오는 것, 그르다 옳다 하는 것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다.>

Posted by 붓다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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