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풍낙엽이라, 만추(晩秋)의 가을 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
습니다.
보통 우리 인생을 가리켜서 '나그네 길'이라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만이 나그네는 아닙니다. 우리 인간 존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분명히 '나그네 길'입니다. 그러나 이 인간 세상뿐만이
아니라 과거 전생이나 미래 내생도 모두 나그네 길입니다.
불교말로하면 '삼계유여객사(三界喩如客舍)'라 욕계(欲界), 색계(色
界), 무색계(無色界) 모두가 하나의 객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나그네 길'은 마땅히 출발점이 있어야 할 것이고,
따라서 종착점이 응당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서 출발했을 것이며,
또 지금은 인간 세상에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서 종착점에 갈 것인
가? 이러한 것은 근본적인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먹고살고 입고하는 의식주에 바쁘다 보니까 보
통은 이런 본질적인 문제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이러한 본질적인 중
요한 문제는 잃어버리고서 우리가 구하는 것은 한도 끝도 없이 가지가
지로 많습니다. 예를 들면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나 사는 것이나 또는
같은 인간끼리 사귀는 남녀간이나 친구지간이나 어떤 관계나 모두가 다
완벽한 그러한 관계를 우리는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런 관계를 추구하
는 것들이 이루어질 수가 있을 것인가?
우리 인간의 근본 번뇌, 고(苦)가운데도 있듯이 '구부득고(求不得苦)
라' 구하지만 우리가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자기 분수에 맞게끔 인
간은 인간대로 또는 아들은 아들대로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정다웁게 분
수에 맞는 것을 요구한다면 모르겠지마는 대부분 다 자기 분수를 떠나
서 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구하는 것은 얻을 수가 없이 항시
불만스러운 것이 전부입니다.
'아프지 않겠다' 이렇게 맘을 먹는다 하더라도 어느 날엔가 우연히
아프고 맙니다. 젊은 날의 내 소중한 젊음이 조금도 변화가 안되고서
항시 계속되면 쓰겠다. 그러나 세월 따라서 주름살도 생기고 하지 않습
니까? 이와 같이 '나그네 길'이라는 것은 그때 그때 변화 무상(無常)한
것인데 우리 중생들은 자기가 좋은 쪽으로만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정말로 우리 인생은 이것 저것 따지고 보면 고행 바다이고 종단에는
그렇게 하다가 이 몸뚱이 몽땅 버리고 죽고마는 것인데 어차피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생하고 울창하던 숲들이 이렇게 다 이울어지고 추풍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만추의 계절, 이런 때는 정말로 우리 인생도 저와 같이
될 수밖에는 없겠구나. 평소에는 우리가 들뜨고 바빠서 미처 못 느꼈다
하더라도 이 가을 만추에만은 자기 본질적인 인생의 문제를 회고해 보
고 성찰을 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성자의 가르침은 '나그네 길'의 등불>>
대체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우리는 각자 성자의 가르침 따
라서 정다웁게 살고 있는가? 성자의 가르침은 우리 나그네 길에서 하나
의 등불입니다. 그분들은 인생과 우주의 본 바탕을 훤히 깨달은 분들이
고 또 우리 출발점은 어디고, 목적지는 어디고, 어떻게 가야만이 바르
게끔 헛눈 팔지 않고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러한 것을
극명하게 우리한테 가르쳐주신 것이 성자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지금 세계화 국제화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성인들의
가르침도 포섭하고 같이 대비해 가면서 화합해야 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고서 우리가 믿는 종교의 가르침만이 최고다 이렇게 생각해서는 화해
를 못합니다. 또는 다른 가르침에는 진리가 없고 우리 불교만이 유일하
게 옳다고 생각할 때는 할 수 없이 다른 가르침을 배격도 해야 하겠습
니다만 사실 핵심은 다 똑 같습니다.
이른바 근본주의(根本主義) 또는 원리주의(原理主義)라, 이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진리에 있어서 근본주의 나 원리주의 이런 편협
한 경색주의를 떠나야 합니다. 꼭 자기 것만이 옳다하는 이런 것을 떠
나지 못하면 국제화 시대에 있어서 어떤면으로나 우리가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자기 마음도 더욱더 부담스럽고 남하고 화해도 못하고 국제간도 마찬
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우리 지표, 우리 등불이 바로 성자
의 가르침인데, 성자들의 가르침은 출발점이나 목적지는 똑 같습니다.
다만 어떻게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할 것인가? 그런 방법적인 문제만 차
이가 있습니다.
오늘은 특히 그런 방법론적인 문제에 관해서 제가 말씀을 주로 드리
겠습니다. 여태까지는 그냥 윤관만 말씀을 주로 드렸지만 우리한테 가
장 소중한 것은 내가 어떻게 공부를 할 것인가? 어떻게 공부를 해서 목
적지에 이를 것인가? 어떤 방법이 지름길인가? 이런것에 역점을 두고서
말씀을 하겠습니다.
<<생사대사(生死大事)>>
생사대사라, 이것 저것 인간 세상에 중요한 일이 많이 있으나 역시
죽고 살고 하는 그 문제가 제일 크지 않습니까. 어떠한 물질적인 풍요
라든가 고귀한 지위라든가 우정이나 애정이나 그런 건 모두가 다 죽음
앞에서는 무엇이 남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문제를
소홀히 생각합니다. 위대한 분일 수록 죽음의 문제를 항시 끼고 삽니
다. 사실은 우리 삶 자체가 죽음의 물결 위에 잠시간 떴다 꺼졌다 하는
물거품에 불과합니다.
죽음 문제를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불교의 말씀으로 하면 이것은
염사(念死)라 생각할 염(念), 죽을 사(死)자 입니다. 죽음을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건강할 때는 항시 건강할 것 같이 함부로 먹고 함부
로 행동을 합니다만 아파보면 그때는 주의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죽음을 좀 생각을 독실히 한다고 할 때는 우리 행동을 함부로 못합니
다.
종교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나는 종단에 죽어야 할 것이데, 아직 젊
은 세대는 다른 사람의 죽음도 별로 경험도 않고, 또 부모님도 살아 계
시는 지라 죽음에 대한 실감이 별로 안 나지만 저 같이 나이가 꽤 많이
먹은 사람들은 전쟁에 나가서 죽은 사람도 많이 보고 또 6.25사변이라
고 하는 그 무시무시한 때에 총으로도 아니고 장작개비로 사람을 때려
서 죽이는 것도 무수히 보았습니다.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도 보았습
니다.
병고나 기타 천재지변으로 인한 죽음이나 어떻게 죽든지 간에 어느
누구나 조만 간에 빠르고 더딘 차이 뿐인 것이지 다 죽고마는 것입니
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도 '불출세 일대사 인연(佛出世 一大事 因緣)이
라' 부처님께서 출세하신 가장 큰일이 무엇인가 하면 '생사대사(生死大
事)'라 죽음의 문제란 말입니다. 공포 공포하지만 제일 두려운 것이 죽
음이 아닙니까. 번뇌 번뇌하지만 죽음의 번뇌가 제일 큽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이나 다른 종교의 가르침이나 모두가 생사대사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영생(永生)이라, 영생은 죽음의 반대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과연
영생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이런 것에 무진 애를 많이 씁니다. 삼천
갑자 동방서기도 그렇게 살려고 애써서 삼천 갑자동안이나 살았지만 결
국은 죽음인 것이고 진시황이 불노장수라 늙지 않고 장수하기 위해서
가지가지 꾀를 많이 부렸지만 지금 어디 흔적이나 있습니까.
그런데 다행히도 성자의 가르침은 죽음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주
었습니다.
우리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장 큰 문제 가장 근본적인 문제
가 우리가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큰 일입니다. 우리가 재가 불자로서 부처
님 공부를 할 때나 또는 수행자가 되어서 공부할 때나 이 문제하고 맞
닥뜨려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가 인생으로 태어난 아무런 보람이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다른 것은 모두가 다 죽음의 무덤에 함께 다 들어갑니다.
소중한 금쪽같은 자기 몸뚱이가 죽음의 무덤에 들어가거든 자기 집이나
자기 금 패물이나 그런 것이 죽음의 무덤에 같이 안 들어가겠습니까.
그러나 성자의 가르침에는 죽음을 이기는 참 지혜가 있습니다. 또는
죽음을 이기기 위해서 어떻게 닦아야 할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은 공식과 같다.>>
그런 지혜와 수행에 대해서 우리가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 가
르침이나 성자의 가르침은 공식과 같습니다. 공식같이 명료한 것인데
우리 중생들이 어줍잖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공식 같으므로 공식대
로만 생활하면 됩니다.
여러분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계정혜(戒定慧) 삼학도(三學道)라, 계
율을 잘 지키고, 참선(參禪) 염불(念佛)해서 우리 마음을 맑게 하고,
마음을 맑게 하다 보면 본래 생명자리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가 훤히
밝아 온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참다운 해탈의 지혜가 옵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생명의 실상(實相)자리 생명의 본질을 미처 모
르는 것이므로 우선은 부처님이나 또는 정통 조사(祖師)나 과거 선지식
들의 말씀을 우리가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선 중생들에 있
어서는 믿음이 가장 소중합니다. 우리가 아직은 진리를 체험도 못하고
우리한테는 소원한 그런 진리이기 때문에 우선은 믿어야 하는 것입니
다. 그런데 지금 신앙을 갖는 분들이 대체로 믿음이 부족합니다. 저도
여태까지 그때그때 법문을 했습니다마는 믿음을 보다 더 역설을 해야
할 것인데 너무나 추상적으로만 흘러 버렸구나 이렇게 반성을 많이 합
니다.
그래서 오늘은 수행론에 있어서 믿음에 대해서 역설을 하고자 합니
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 인생 이것은 현상적인 존재입니다. 현상이라
하는 것은 실상이라는 우주의 본질로부터 인연에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툰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있어서 현상(現象)과 실상(實相)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우리 중생들이 보는 이것은 자기를 위시해서 삼천 대천 세계
모두가 다 현상입니다. 잠시간 존재하는 그런 현상에 불과합니다. 영생
불멸(永生不滅)한 진여실상(眞如實相)은 우리 중생은 볼 수가 없고 성
자는 그 자리와 홀연히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영생불멸한 그 자리로
부터서 인과의 법칙 따라서 잠시간 이렇게 저렇게 모양을 나툰것이 현
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이래 우리가 인류로 태어났으면 같이 화합하고 같이 평등
하고 같이 자유스럽게 살면 좋을 것인데 그렇게 살지 못하고서 분열과
반목과 싸움과 이런것이 연속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우리 한국도 단군 개조이후에 얼마나 많이 싸
웠습니까. 병자호란이라 임진왜란이다 그 큰 것은 그만 두고라도 우리
민족이 외침을 당한 것이 900번 이상이라 합니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
리고서 이조 말엽에 당쟁을 하다 나라를 팔아먹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당끼리 싸우는 것을 보십시오. 물론 정당
한 싸움도 있겠지만 대체로 보면 자기 당적인 이익 이른바 집단적인 이
익 때문에 싸운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우리가 인생과 우주의 참 뜻을 잘 못 보는데서
옵니다. 참다운 지혜에 입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위급하고 급박한 위기 상황에 놓여있는 현대 사
회는 과거와 같은 시행착오를 지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겨를이 없
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무서운 핵무기 때문에 한번 시행 착오를 한
다고 생각할 때는 내 민족이나 또는 그대 민족이나 단 한번에 망해 버
리는 것입니다. 그런 무서운 때가 아닙니까. 지금 세계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핵 자체가 우리 지구 덩어리 몇 개를 완전히 파괴할수 있는 그런
위력을 낸다고 합니다.
<<인류가 핵의 위기로부터 벗어나려면 영생불멸한 성자의 지혜를 따
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칼이나 또는 소총이나 활이나 이러한 것들로 싸
울 때는 좀 싸우게 된다 하더라도 죽을 사람 죽고 산 사람 살겠지마는
지금 역사적인 이 위기상황 핵 시대에 있어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한번 시행착오를 범하면 전 인류가 파멸되고 맙니다.
따라서 지금만큼은 꼭 우리가 영생불멸한 성자의 지혜를 따라야 됩니
다. 안 따르면 파멸뿐입니다. 우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 각 성자가
말씀하신 그 지혜를 남의 일로 생각을 마십시오, 지혜에 따라서 살지
못하면 우리에게 행복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 행복 아닙니까.
금생에 기왕이면 편히 살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것은 누구나 다
추구하는 바이지만 행복하지 못하단 말입니다. 행복하게 못사는 것은
과거 전생에 우리가 잘못 지어서 그랬을 것이고 또 금생에도 태어나서
유치원 때부터서 대학까지 배운다는 것이 참 한심스러운 것뿐이기 때문
입니다.
왜 한심스러운 일인가? 우선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지금 혼란스러운
우리 대학가를 보십시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바른 지혜를
배우지 않고서 눈에 보이는 것, 아까 제가 말씀드린 허망무상한 것에
불과한 그런 현상 이것이 사실로 존재한다. 이렇게 배웠단 말입니다.
꿈이 사실로 존재하겠습니까? 그림자가 사실이겠습니까? 사실 우리
인간의 때묻은 범부중생의 눈으로 보는 것은 모두가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뿐입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범부의 때묻은 눈으로 본다
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착각뿐입니다. 전도몽상 이것을 참말로 있다
고 생각을 합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보
기 때문에 그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인생고가 바로 따라 오는 것입니
다. 부처님 말씀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공식입니다.
혹업고(惑業苦)라. 번뇌가 있으면, 그 번뇌에 따라서 입과 몸과 뜻으
로 죄를 범하고,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범하면 그때는 틀림없이 인생
고(人生苦)가 있습니다. 공식입니다. 따라서 인생고를 떠나고자 하면
그 역으로 무명심(無明心) 무지 무명 때문에 고(苦)가 있는지라 우선
무지 무명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무지 무명을 떠나는 지혜(智慧)가
바로 부처님 지혜고 예수의 지혜고 공자의 지혜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석가는 위대한 성자이므로 그렇다지만 나 같은 중
생이 어떻게 석가 같이 행동을 할 것인가? 부처님이나 예수 같은 성인
들은 본래 잘나고 거룩하므로 그렇게 행동을 할 수 있었겠지만 우리 같
은 중생은 그렇게 안해도 되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다 그렁저렁 살
지 않는가? 이제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렇게 살았어도 그렁저렁 살수가 있었습니다. 그러
나 현대는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현대라 하는 그 무서운 시
대를 잘 관찰해야 합니다. 가사 하나의 음악을 두고 본다 하더라도 음
악도 역시 지금 꽉 막혀 있습니다. 왜 막혀 있는가하면 요즘 재즈 음악
이나 락 음악 같은 것을 보십시오, 반은 미쳐서 이른바 광란 가운데서
도 그런 광란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 젊은 세대들이 좋다고 날 뛰
고, 또 젊은 소년 소녀들은 그것에 미쳐 가지고서 이따금 아프기도 하
고 말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지금 광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이시대는 바르게 못살면 자기도 망치고 나라도 망치고
다 망칩니다. 그렇게 방정맞고 자극적인 음악을 좋다고 생각하는 우리
현대 젊은이들 마음은 거칠고 혼란 되어 있습니다.
물론 다는 아닙니다마는 미술도, 저는 미술이나 음악을 잘 모릅니다.
이른바 추상적인 미술형태는 선만 몇 개 찍찍 그어 놓고서 이걸 작품이
라고 합니다. 물론 그런 것이 우리 같은 문외한들이 다 이해를 못하겠
지요. 그런대로 또 우수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런 것은 모두가
다 우리 마음들이 불안스러운데서 그런 작품들을 냈다고 생각을 합니
다. 정말로 그 마음이 예수 같고 석가 같고 공자 같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예술은 생기지 안했을 것입니다.
어떻든 예술도 바른 영생해탈의 그런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금 꽉 막혀 있습니다.
과학도 지금 얼마만큼은 물질의 한계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을 떠나서 물질의 저 근본인 피안(彼岸)은 무엇인가? 본바탕은 무
엇인가? 이것은 지금 과학도 모릅니다. 과학은 내나야 시간성 공간성
에 가려 있는 그 범주 내에서만 아는 것이지 시간 공간을 떠나 버리는
것은 모른단 말입니다.
<<정말로 정말로 다 빈 것입니다.
오직 하나의 생명 자체만 영생합니다.>>
우리 마음이 물질입니까? 우리 마음이 시간이 있습니까 공간이 있습
니까. 우리 마음은 시간성도 공간성도 없는 순수한 생명 자체입니다.
따라서 제아무리 정밀한 전자 현미경을 놓고 본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
이 보입니까.
그러나 좋다 궂다 불행하다 행복하다 이렇게 느끼는 것은 우리 마음
이아닙니까. 아무리 몸뚱이를 아껴도 마음이 주인공(主人公)인 것이지
몸뚱이가 주인공은 아니지 않습니까. 따라서 방금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가 지금 당면해 있는 모든 문제는 너무나 각박합니다. 미술이나 음
악이나 문학도 말입니다.
오늘은 가장 길게 말씀을 드리려고 했던 것인데 할 수 없이 짧게 말
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날씨가 우리를 돕지 안해서 할 수가 없습니
다.
부처님 가르침은 제가 너무 잔 말씀을 안 드린다하더라도 현상적인
문제라 하는 것 이것은 모두가 다 몽환포영(夢幻泡影)입니다. 여러분들
다 아시지 않습니까.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이나 이 몽환포영의 말씀은
그런 경을 보신 분들은 모르신 분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통은 다 실
감이 미처 안 납니다.
가사 자기가 그런 설법을 하고서도 내려서면 그냥 눈에 보이는 것에
젖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가 다 제법이 비었다는 것에 대해서
참말로 체험적으로 실감이 안 가서 그럽니다. 정말로 정말로 다 빈 것
입니다. 여러분들이 공부를 좀 해 보십시오. 해 보셔서 우리가 기도를
모시나 참선을 하나 무아무중(無我無重)이라 적어도 공부를 하셔서 무
아무중이라는 경계는 좀 맛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아무중에 딱 들
어가면 그때는 자기 몸뚱이가 아무 무리가 없단 말입니다. 꼬집어 뜯어
도 아프지도 않는 것입니다.
삼매(三昧)까지는 미처 못 들어가도 기압을 하는 분들이 기압을 지르면
서 칼로 자기 배를 찔러도 피가 안 나는 것이고 칼을 때면 다 오므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본래 그런 것인데
우리 중생이 번뇌 때문에 몸에다 칼로 찌르면 피가 나고 또 아프고 하
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삼매에 들 때는 그런 것을 다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래
서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 우리 중생
차원에서 있다고 보는 것이지 성자의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당
체(當體) 다 즉공(卽空)이라 색은 물질이 아닙니까. 색즉공도 그와 똑
같이 물질을 분석한 뒤에 깨고 부수고 해서 공이 아니라 물질 그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성자들은 그렇게 강도가 높은 금도 역시 금 그대로
공이라, 다이아몬드도 그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번뇌에 가
려서 그 자리를 미처 못 보는 것입니다.
왜 공(空)인가? 이것은 일체 존재가 물질이 아닌 영생불멸(永生不
滅)한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부터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상(相)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간 상을 냈습니다. 상 이것은 본래(本來)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모르고 상관이 없이 영생불멸한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자리요 불성(佛性)이고 법성(法性)이고 합
니다.
거기서 부터 잠시간 모양을 낸 것입니다. 잠시간 모양을 내서 그것이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 찰나도 머물고 있지를 않습니다.
찰나(刹那)라 하는 것은 일초의 75분지 1이라고 합니다. 그보다도 훨씬
짧은 동안도 고유하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도 머물지가 않
거니 똑 같은 것이 어디 있다고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까.
내 몸은 오늘도 같고 내일도 같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차고
있는 금시계는 오늘도 같고 내일도 같다. 우리 중생이 보아서 같은 것
이지 순간 순간 마멸되고 맙니다.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일체만유는 인연생 인연멸이다.>>
그런 것을 우리 중생들이 세밀한 것을 잘 못 보니까 어제나 오늘이나
같다고 생각합니다.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인연생(因緣生)이라 일
체만유(一切萬有)가 인연생 아닙니까. 인연생인 그것은 원인이 무엇인
가? 원인이 부처님입니다. 원인이 불성 법성입니다.
우리 중생은 인연법 하면 그 연(緣)만 보는 것이지, 연도 중생은 확
실히 못 봅니다. 근본 원인을 못 봅니다. 근본 원인을 보는 것이 성자
입니다.
'견성오도(見性悟道)'라 뭘 깨닫는 것인가? 근본 성품(性品)을 깨닫
는 것입니다. 따라서 근본 성품자리는 다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시는 바
와 같이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이것은 항시 영
생 그대로 있는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그러한 도리(道理)입니다. 상
주불변하는 그런 도리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무상한 것이니까 다 허망하지 않는가? 이것도 저것도 공이 아
닌가? 여기 까지만 알 때는 이것은 허무주의(虛無主義)와 똑 같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이 허망한 것이지 본래로 영생불멸한 진여불성이 언제
어느 때나 우주에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느끼셔야 합니
다.
그와 동시에 그러한 불타관(佛陀觀) 부처님이 무엇인가? 하는 불타관
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부처님을 믿는 참다운 믿음입
니다.
다시 되풀이해서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보는 것은 다 허망 무상한 것
이고 본래로 없는 것이고 참말로 있는 것은 영생 불멸한 진여불성이다.
부처님이다. 진여불성 이것은 생명의 본체입니다. 생명의 본체이니까
이것은 하나의 인격(人格)입니다. 제한된 인격이 아니라 무한한 인격입
니다. 이 자리를 우리가 확실히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좀 하면 그냥 깨달아 버린다. 화두(話頭)를 참구하면 단박
에 되어 버린다. 이런 식으로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지금
현재라 하는 것은 금생에도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잘못 듣고 잘못
배우고 잘못 생각하고 이런 번뇌가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에 습기(習
氣)로 해서 꽉 차 있습니다. 과거 무수생 동안에 더러는 지옥(地獄) 중
생으로 더러는 흘러 내려 올 때 그때그때 생마다 지었던 업장(業障)이
지금 우리 의식에 또 꽉 차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의식이 염불(念佛)
좀 하고 화두(話頭)좀 하고 이런 걸로 해서 단박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
란 말입니다.
물론 과거 전생에 많이 닦아서 선량하고 선근이 깊은 사람들은 그렇
게 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특수한 사람뿐인 것입니다.
우리 인류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을 보십시오. 기독교 인구가 세계 18
억이고, 불교 인구가 세계에서 10억이라. 이슬람도 10억은 넘는다고 합
니다. 세계인 총의 반 이상이 넘으면서도 지금 혼란스럽고 죄악은 차근
차근 더 짙어 가는 것을 보십시오. 그것은 뭐인고 하면 제법 그럴듯하
게 입으로만 한단 말입니다. 입은 알지만 몸으로는 못 느끼고 못 행하
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기로에 서 있습니다. 참말로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구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삿된 견해에 따라서 세속적인 관념에 따라서 그
렁저렁 살다 고생고생하다 반목 분열 투쟁만 하다가 죽을 것인가? 선택
은 우리한테가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선택을 잘하셔서 불자가 되
었는데 그렇더라도 그 선택한 진리(眞理) 밑에서 진실하게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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