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현대문명
近代人間은 비판적이고 客觀妥當한 것이 아니면 容認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禪이 객관타당함을 밝혀서, 선이야말로 현대에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존재 가치가 있는 참다운 종교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근대적 인간은 인간의 이성을 자각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 이성적 입장은 반이성적인 것을 온전히 제거해서 이성적인 것만 있게 하는 것으로 이성의 構造上 불가능한 것이다. 이성적인 것과 반이성적인 것의 대립이 이성의 근본구조이다. 이성과 반이성이 대립해서 二律背反이 되는 것을 상대적 이율배반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성은 반이성을 항상 隨伴하므로 반이성적인 것을 窮盡無餘하게 제거해 버린 순수한 이성은 없으며, 그러한 이성을 참 이성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이와같이 상대적 이율배반을 더욱 근원적으로 비판하면 상대적 이율배반이 절대적 그리고 전체적 이율배반이 되고 만다. 이것을 절대이율배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절대이율배반은 관념적으로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이율배반이 자기화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근대 이성적 입장에 있는 近世的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절대이율배반이란 中道의 證智를 의미하며, 근세적 인간은 여기까지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보임)
이 절대이율배반에 인간의 絶對否定(중도?)의 근거가 있다.
인생문제를 다룰 때에 그 생사문제가 중요하므로 이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生은 死를 분리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는 생을 분리해서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수반의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생사하는 생명이 生하여 死를 극복해 가는 것은 상대적으로는 할 수 있으나 사가 없는 순수한 생은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 생명의 根底에 생사라는 이율 배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생사의 상대적 이율배반을 근원적으로 비판하면 그 생이 사를 수반하는 생이므로 순수한 생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생사적 생명은 절대적으로 사의 생명을 면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생명은 생사라는 절대이율배반을 근저로 해서 성립한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 생사를 擴充하면 물질의 生滅과 통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존재·비존재에 까지 미치게 된다.
생사의 절대이율배반 때문에 인간은 고뇌하는 것이니 이것을 여의고 解脫하려고 하는 것은 거기에 이 성적 판단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인간에 있어서는 생사의 절대이율배반과 이성 · 반이성의 절대이율배반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一體라고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성의 절대이율배반과 생사의 절대이율배반은 구체적으로는 일체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보통 인간의 본래적 참모습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객관적이라고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보통의 인간은 의식이 現行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서 주체적 절대이율배반이 되어 도달한 境地는 純粹意識(분별이 없는 의식)이니 禪定進中의 한 단계이다. 이 순수의식의 경지에서 주체적으로 절대이율배반이 되어 나아가면 무의식의 경지가 된다. 여기에서 잠이 깨어 있을 때의 무의식과 無夢無想 한 熟眠時의 무의식이 주체적으로 절대이율배반이 되어서 無餘하게 包括的이고 전체적이고 근원적으로 파고 들어가서 궁극적 근원적인 경지에 도달하면 宗門에서 말하는 寤寐一如가 되는 것이다. 이 궁극적 근원적인 주체적 절대이율배반이 해체되어 淸淨해서 一物도 없되 山은 산이요 물(水)는 물인 경지로 전환한다.
그러나 여기 坐在 하면 荊棘林을 透過한 것이 못 된다. 여기를 頓然透過하여야 見性하여 正眼宗師의 正法眼藏을 깨달은 것이 되는 것이다. 이 형극림을 투과해서 견성한 것은 인간의 근원적 주체성이 되는 본래 면목이 자각한 것이다.
이 본래 면목이 자각한다고 하면 시간적으로 한정되는 것 같이 된다. 엄밀히 말하면 자각이라고도 할 수 없다. 본래 면목 자체가 엄연히 본래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 본래면목은 인간의 본래의 진실상이다. 이것은 장소에 불구하고 시간에 불구하고 어느 시간이나 어느 장소나 누구에게든지 타당하다고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래서 禪門에서는 이 본래 면목을 本分이라고 한다.
覺하는 機緣은 실로 여러 가지로 잡다해서 무한하다고 말하겠다. 그 무한한 기연은 결국은 절대이율배반에 불과한 것이다. 주체적 절대이율배반까지 가서 그것을 透過하여 본래로 불생불멸하여 시간 공간을 초월하고 본래로 淸淨無染하여 자유자재하며 형상이 없으면서 일체형상을 창조하는 진실한 자기로 돈연히 전환하므로 전체적 근본적으로 해결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無明煩惱가 一斷一切斷이 되는 것이고 一處透 一體處透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頓悟頓修는 이를 말하는 것이다. 불교의 궁극적 방법은 眼耳鼻舌身意의 六識과 七識도 아니며 무의식의 제팔아뢰야식도 아니고 종교적 信도 아니고 禪에서 말하는 覺인 것이다.
각한 진실한 자기는 각하기 이전의 보통의 자기의 근원이 되는 것이고, 각하기 이전의 자기 작용은 바로 각한 진실한 자기의 작용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覺한 자기의 현실에 궁극적으로 부활하는 데에 진정한 종교가 성립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이성적 자기가 주체적이였던 현실은 覺한 자기를 주체로 하는 현실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 覺한 현실은 迷한 현실과 시간공간적으로 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공간의 근원에서 시간공간이 거기에서 성립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또한 각한 자기, 즉 근원적 주체는 이성과 감성의 근원이 되는 것이며, 이성과 감성은 각한 자기의 작용이 되는 것이다. 이 근원적 주체는 이성을 초월 해서 자유로 이성으로 살고 생사를 초월해서 자유로 생사하는 영원의 현실이다. 이것은 절대 긍정적으로 역사를 無碍自在하게 창조하는 입장이다.
소위 천국이나 극락세계는 현실의 역사와는 전혀 개별의 세계이므로 결국 逃避厭世하는 것이 되어서 현실이 구제된다고 할 수는 없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현대과학문명을 비판하고 이 과학문명과 禪과의 관계를 透察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을 다시 투찰하면 미래 세계역사를 어떻게 창조하여야 되겠는가 하는 의심이 쉽게 풀리게 마련이다.
선에서는 존재원리를 일체를 융합하는 普遍의 一과 多 혹은 特殊와가 不二一體라 하겠다.
그런데 과학문명은 多화 혹은 특수화가 그 특징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과학문명은 「普遍」의 일을 상실하게 되어서 분열병에 걸리고 있다.

「多」를 상실한 도그마적 신앙으로 된 「一」을 믿었던 중세기는 一多不二一體의 존재원리를 파괴하는 것이 되어서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대로 근대문명은 「一」을 상실한 「多」만으로 치닫고 있으니 이대로만 간다면 결국 분열병으로 멸망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시간공간을 초월한 無相永遠의 자기가 자각한 禪은 일다불이일체가 된다. 이 원리에서 과학문명을 다시 창조함으로써 세계역사는 분열하지 않고 화합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 그 주체적 문제를 證明하겠다. 현대의 기계문명이 발달할수록 우리 생활은 편리하고 풍부해지는 반면에 사회생활은 복잡해 지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집단과 집단의 관계, 국가와 국가의 관게가 복잡하게 되었다. 이렇게 집단적 복잡화와 과학문명의 복잡화가 서로 엉켜서 우리 생활은 아주 복잡해 가고 있다.
이와같이 복잡해 갈수록 우리는 그 복잡한 데에 자기 자신이 끄달려서 자기를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현대의 특징은 분열병 또는 노이로제, 심지어 정신병이 많아지고 있다. 이것이 인간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있는 현대의 큰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의 근원적 주체성 「본래면목」은 어떠한 복잡한 데에도 끄달리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이 다.
인간은 근원적 주체성이 본래로 평등하고 모든 사람이 본래로 일체인 것이다. 자비가 이러한 근원적 주체성에 본래로 갖추어져 있어서 상호대등한 관계에서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근원적 주체성이 본래로 형상이 없이 자유자재한 만큼 그 자비행도 어디에 나 걸림이 없이 행하게 된는 것이다. 기독교에는 神만이 絶對愛를 인류에게 내린다고 한다. 인간은 이 절대애에 밑받침된 隣人愛 를 행할 뿐이며 인간은 절대애를 행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의 자비는 인간이 본래로 佛이고 인간이 절대애를 對等格으로 서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 사람들은 역사는 대립에서 대립으로 흘러간다고 말한다. 현재는 언제든지 대립상태에 있다는 것이 변증법적 사고방식이 다. 이 대립을 투쟁으로 해결해 나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변증법적 역사관이라고 하는데 이것으로는 결국 평화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그 근원적 주체성에서 보면 모두 평등하고 일체가 됨으로 항상 자비행을 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비화합의 현재라고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래서 역사는 자비화합의 바탕에서 대립을 해결해 나가게 된는 것이다. 이와같이 자비화합의 바탕에서 대립을 해결해 나가는 역사라야 세계평화를 진정으로 이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근원적 주체성으로 보아서 어느 민족이든지 어느 인종이든지 절대평등하고 自然불이일체라고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러한 인류 차원에서 오늘의 세계 현상을 비판해 보기로 하겠다.
과학은 물질을 연구의 대상으로 한다. 자연과학은 일체의 존재하는 것을 물리적 現象으로 생각하므로 자연과학이 모든 과학의 모범이 되는 것이다. 사회과학 또는 정신과학이 과학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을 때에는 그것은 물질에 관한 학문인 자연과학 물리학을 그 모범으로 한다. 과학은 물질적이라고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래서 과학에는 생명관이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대자연을 지배하는 또는 생명관이 없는 이 과학문명은 지구상의 많은 생물을 죽이고 심지어 인명까지도 輕視하며 대자연을 파괴 오염시켜서 그 공해로 생물은 살 수 없게 되고 그 자연 바탕위에서 살 수 있는 인간까지도 그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는 것이 바로 현실인 까닭이다. 그리고 인간이 욕망만으로 산다면 스스로 타락하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해쳐서 파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근원적 주체성의 입장에서는 모든 생물, 모든 대자연이 영원의 한 생명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원리에서 모든 생물을 존중하고 대자연을 아끼는 지혜와 자비로 과학문명을 다시 창조함으로써 지구는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청정불국토로 건설될 것이다.
과학문명이 우리 인류에게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또는 편리하게 생활하도록 공헌한 바가 막대하다고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나 오늘날은 과학문명만으로는 도저히 행복하게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류가 파멸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렇 다고 해서 과학문명을 부정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래의 진실한 인간상〔본래면목〕이 과학문명을 밑받침해서 다시 역사를 창조할 때에 인류는 진실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한 인간상을 깨달아야 하지마는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모두가 실지로 깨달음을 기다려 역사를 창조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래의 진실한 인간상이 이러한 것인 만큼 진실한 인간상에 순응해서 행동함으로써 진실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 이다.
본래면목은 의식은 물론이요 무의식까지도 투과하고 거기에도 머무르지 않고 獨脫無依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같이 문자언어로 횡설수설하고 체계논리를 繁論亂道하는 것은 본분과는 천리만리 어긋나 버린다고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래서 대종사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 대종사라고 할 수 있는 마조 대종사가 본분에서 提 直指한 법문을 들어서 불조의 落處를 밝혀 보겠다.
馬大師與百丈行次에 見野鴨子飛過하고 大師云, 是什魔오 丈이 云野鴨子니다. 大師云 什魔處去也오 丈云飛過去也니다. 大死遂 遂百丈鼻頭하니 丈이 作忍痛聲이어늘 大師云 何會飛去오.
마조 큰스님께서 백장스님과 함께 갈 때에 들오리가 날아 가는 것을 보고 마조 큰 스님이 말했다.
「저게 무엇인고?」백장스님이 말하되, 「들오리입니다.」마조 큰스님이 말하되, 「어디로 갔는고?」백장스님이 말하되,「날아 갔습니다.」마조 큰스님이 바로 백장스님의 코를 비틀므로 백장스님이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니 마조 큰스님이 말하되,「어디 날 아갔느냐?」
마조 대종사는 백장스님을 깨우치기 위해서 바람 없는데 물결을 일으키고 고운 살결에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격으로 백장스님에게 법문하신 것이다. 깨달으면 世間事가 바로 本分事이고 깨치지 못하면 모두 세간사가 되어버려서 자유자재하지 못한 것이다. 마조 대종사가 백장스님의 코를 비틀지 아니 했으면 백장스님은 깨치지 못했을 것이다.
마조 큰스님과 백장스님이 서로 문답한 것이 昭昭靈靈한 見聞覺知 같지만 소소영영한데에 住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백장스님이 깨달음에 머무른다면 廓撤大悟가 못 되는데 再參因緣에서 마조 큰스님이 喝한 데에서 백장스님은 확철대오한 것이다. 다음에 그 재참 인연을 들어 보겠다.
百丈이 再參馬祖하니 祖竪佛子어늘 師云 卽此用가 離此用가 祖掛佛子於舊處어늘 師良久한대 祖云汝己後에 開兩片皮하여 將何 爲人고 師遂取佛子竪起한대 祖云 卽此用가 離此用가 師亦掛佛子於舊處어늘 祖便喝하니 師直得三日耳聲이라.
백장스님이 두 번째로 마조 큰스님께 뵈어 참하니 마조스님이 불자를 세우니까 백장스님이 말하되 이것에 즉하여 활용하는가? 이것을 떠나서 활용하는가?
마조 큰스님이 본자리에 불자를 걸거늘 백장스님이 잠깐 잠잠이 있으니 마조 큰스님이 말하되 그대는 이 후에 두 개 입술을 열어서 어떻게 사람을 위하겠는가? 백장스님이 불자를 갖다가 세우니 마조 큰 스님이 말하되 이것에 즉하여 활용하는가? 이것을 떠나서 활용하는가? 백장스님이 또 불자를 먼저 자리에 걸거늘 마조 큰스님은 바로 고함을 치니 백장스님은 삼일 동안 귀가 먹었다.
마조 대종사의 일할(一喝)에 백장스님이 3일 동안 귀가 먹었다. 그래서 마조 대종사의 正眼을 백장스님이 전수하게 된 것이다 . 백장스님은 마조하의 3대 정안종사 중의 일인이 된 것이다 . 그러나 이 두 대종사는 彌天罪過를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아래에 着語를 하겠으니 보기 바란다.
兩大和尙이 伊魔商量하니
失錢遭罪로다 何故如此오
眞金失色이오 瓦礫生光이로다.
金牛途炭하니 不見縱跡이로다.
針眼魚呑 大天世界하고
焦螟微筮은
吐妙高山이로다.
別別
一蓬蒿箭이 攪動億兵이로다.
喝一喝
두 큰 스님이
이렇게 법거량하시니
돈을 잃고 처벌당함이네
어찌하여 그러한가?
침금이 빛을 잃고
기와장 조각돌이 防光하는구나
금소가 鎔鑛爐에 녹으니
자취를 볼 수가 없네
아주 작은 물고기는
우주를 삼키고
지극히 작은 벌레는
수미산을 토해내누나
별별 ,
한 쑥대화살이 억병을 요동시키도다
할, 일할 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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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붓다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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