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진소경 계임에게 답함(1)
편지를 받으니 이 일대사인연에 뜻을 두고자 하나 근기와 성품이 지극히 둔하다고 하니 만약 과연 이와 같다면 마땅히 그대를 위해 축하를 드립니다.
지금의 사대부들은 대개가 이 일에 모든 공안(公案)에 막힘이 없이 바로 깨달을 수 없는 것은 근성이 너무 날카롭고 지견이 너무 많아 종사(宗師)가 막 말을 시작하면 이미 한번에 알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도리어 둔한 근기가 허다한 그릇된 지각(知覺)이 없어 문득 일기(一機), 일경(一境)과 일언(一言), 일구(一句)에 깨달아버리는 것과 같지 못하니 곧 달마(達磨)대사가 나오셔서 모든 여러 가지 신통을 쓰더라도 그를 어찌 할 수가 없으니 다만 그에게는 장애될만한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근기가 날카로운 자는 도리어 근기에 장애를 입어, 문득 꺾어 버리거나 부술 수가 없습니다. 설사 총명한 알음알이(知解)상에서 배우더라도 자기 본분사(本分事)에는 더더욱 힘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남전(南泉)화상은 “요즈음 선사는 너무 많은데 어리석고 둔한 사람은 찾을 수가 없다.”고 말씀 하셨으며 장경(章敬)화상은 “지극한 도리는 말을 떠났거늘 요즘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굳이 그 일(말)을 익히는 것으로 수행으로 삼으니 자성이 본래 塵境(6진과 6경)이 아니라 이것은 미묘한 대해탈문이며 있는 바의 감각(感覺)은 물들지도 않고 걸리지도 않으며 이와 같은 광명이 일찍이 쉬거나 없어지지도 않았다. 오랜 겁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본디 바뀜도 없음이 마치 해가 멀고 가까운데 서로 비추어 모든 사물에 도달하나 일체와 화합하지 않는 것과 같다. 신령스럽게 비추고 묘하게 밝음은 수련을 빌리지 않지만 깨닫지 못하는 까닭으로 사물을 취하는 것이다. 다만 눈을 비벼서 망령되이 허공 꽃이 생기는 것과 같아 헛되이 스스로 수고롭게 하여 잘못 세월을 보내니 만약 돌이켜 비추어 볼 수 있다면 다른 나(我)가 없을 것이다 일상의 행동이 실상과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하셨으니 그대는 근기가 둔하다고 하니 이와 같이 한번 반조해 보십시오.
둔함을 아는 자는 도리어 둔합니까? 만약 회광반조(回光返照) 하지 않고 다만 둔한 근기만을 지켜 다시 번뇌를 일으킨다면 곧 이것은 환망(幻忘) 위에 환망(幻忘)을 더하는 것이며 허공꽃(空花) 위에 다시 허공꽃을 보태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다만 들으십시오. 근성이 둔함을 아는 것은 결코 둔하지 않나니 비록 이러한 둔하다는 생각은 고수(固守)하지 말아야겠지만 또한 이러한 둔한 참구는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취하고 버림, 이근(利根)과 둔근(鈍根)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마음은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과 일체(一體)여서 둘이 아닙니다.
만약 둘이라면 법은 평등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고 마음을 전함이 모두 허망한 것이며 진실을 구함이 점점 어긋나게 될 것입니다. 다만 일체이고 둘 아닌 마음이 결코 취하고 버리고, 이근(利根)과 둔근(鈍根) 사이에 있지 않음을 안다면 곧 달을 보고 손가락을 잊고 바로 한칼에 두 동강 낼 것이나 만약 다시 머뭇거리고 의심하여 앞과 뒤를 생각하고 잰다면 곧 이것은 빈주먹 손가락 위에서 실다운 견해를 내며 근(根),경(境),법(法)중에 헛되이 터무니없는 사실을 꾸며내는 것이니 음계(陰界) 가운데에 망령되이 집착하여 갇혀 있어 깨달을 때가 없을 것입니다.
근래에 한 삿된 스승이 묵조선을 설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온 종일 이 일(깨달음)에 관여하지 말고 쉬고 쉬되 소리를 내지 말라 업에 떨어질까 두렵다고 하는데 종종 사대부가 총명함과 날카로운 근기의 부림을 당하여 대개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다가 문득 삿된 무리의 고요히 앉으라는 가르침을 입고 또한 힘을 드는 것을 느끼고는 곧 만족하게 여기고 다시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 다만 잠잠한 것으로 지극한 이치를 삼습니다.
나는 구업(口業)을 아끼지 않고 힘써 이러한 폐단을 구하니 지금 점점 그릇됨을 아는 자가 있습니다.
원하건대 그대는 오로지 의심이 타파되지 않는 곳에서 참구하되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놓지 마십시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묻되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없다>고 한 이 한 글자는 곧 생사의 의심을 부수는 칼날입니다.
이 칼과 칼자루는 다만 본인의 수중(手中)에 있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손을 대게 할 수 없고 마땅히 스스로 착수해야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생명을 버릴 수 있으면, 바야흐로 스스로 손을 대고자 할 것이나 만약 목숨을 걸지 못하겠거든 장차 다만 의심이 부서지지 않는 곳에서 공부를 지어 간다면 문득 자연히 목숨을 한 번 버리려 하여 곧 깨달을 것이니 그 때에 비로소 고요한 때가 곧 시끄러운 때이며, 시끄러운 때가 곧 고요한 때이며, 말 할 때가 곧 침묵하는 때이며, 침묵하는 때가 곧 말할 때라는 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애써 다른 사람에게 묻지 않더라도 또한 자연 삿된 스승의 어지럽게 말하는 것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지극히 바랍니다.
옛날에 주세영(朱世英)이 일찍이 편지로 운암진영(雲庵眞淨)화상에게 묻기를 “불법은 지극히 오묘하니 일상에 어떻게 마음을 써야하며 어떻게 몸소 궁구해야 하는지 바라건대 자비로 가르쳐 주십시오.” 진정화상이 이르시기를 “불법은 지극히 묘하여 둘이 아니나 다만 오묘함에 이르지 못하면 장단(長短)이 있으니 만약 오묘함에 이르면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진실로 자신의 마음이 구경(究竟)에는 본래 부처라는 것을 알며 진실로 자재(自在)하며 진실로 즐거우며 진실로 해탈이며 진실로 청정하여 일상에 오직 자신의 마음을 쓰니 자신의 마음의 변화를 잡아 곧 쓸지언정 옳고 그름을 묻지 마라. 마음을 헤아려 사량하면 이미 옳지 않은 것이다.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낱낱이 천진이며 낱낱이 밝고 묘한 것이며 낱낱이 연꽃이 물에 젖지 않는 것과 같으니 중생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중생이거늘 미혹과 깨달음에 말미암은 때문에 저것과 이것(중생과 부처)이 있게 된다. 지금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마음을 믿지 못하며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의 명묘수용(明妙受用: 밝고 묘한 수용)을 얻지 못하며 자신의 마음의 안락해탈(安樂解脫)을 얻지 못하고 마음 밖에 망령되이 선(禪)의 길이 있다고 하여 망령되이 기특함을 세우고 망령되이 취하고 버림을 내나니 비록 수행하더라도 외도이승(外道二乘)의 선의 고요한 단견(斷見)경계에 떨어져 있게 된다. 이른 바 수행함에 단견(斷見)과 상견(상견)의 구덩이에 떨어짐이 두려운 것이니 단견(斷見)이라는 것은 자기의 마음의 본래 오묘하고 밝은 성품을 끊어 버리고 한결같이 마음 밖의 공에 집착하여 선의 고요함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상견(常見)이라는 것은 일체의 법이 공(空)임을 깨닫지 못하고 세간의 모든 유위법에 집착하여 구경법(究竟法)으로 삼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삿된 스승의 무리들은 사대부로 하여금 마음을 모으고 고요히 앉아 모든 일에 관여하지 말고 쉬어라고 하니 어찌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쉬는 것이 아니며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며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와 같이 수행한다면 어찌 외도이승(外道二乘)의 선적단견(禪寂斷見)의 경계에 떨어지지 않으며 어찌 자신의 마음의 명묘한 수용과 구경안락과 여실청정(如實淸淨)한 해탈변화(解脫變化)의 오묘함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본인이 보고 스스로 깨달으면 자연히 고인의 말에 끌려 다님을 입지 않고 고인의 말을 굴릴 수 있을 것이니, 예컨대 청정한 마니보주(摩尼寶珠)를 진흙 속에 두어 수많은 세월이 흐르더라도 또한 물들지 않으니 본래자체가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도 또한 그러하여 미혹할 때엔 번뇌의 미혹됨을 당하나 이 마음의 자체는 본래 일찍이 미혹되지 아니하니 이른바 연꽃이 물에 젖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홀연히 만약 자신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깨달아 구경(究竟)에 자재하여 여실히 안락(安樂)하면 가지가지 묘용(妙用)이 또한 밖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니 본래 스스로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정해진 법이 없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이름하며 또한 여래가 설할 수 있는 확정된 법은 없다.”고 말씀 하셨으니 만약 본체(本體)를 확정시켜 실제로 이러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도리어 옳지 못한 것입니다.
부득이하여 미혹과 깨달음, 버리고 취함에 말미암아 도리를 설함이 약간 있으나 오묘함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방편의 말일뿐입니다.
참된 본체는 또한 약간도 없으니 청컨대 그대는 이렇게 마음을 써서 일상의 가운데 삶과 죽음, 부처님의 도리가 있다는 것에 집착하지 말며 생(生)과 사(死), 부처님의 도리를 물리치고 무(無)로 돌리지도 말고 다만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없느니라.>를 들되 절대로 의근(意根)에서 헤아리지 말며, 말에서 살림살이를 삼지 말며, 또한 (선사가) 입을 여는 곳에서 알지 말며, (선사가) 격석화섬전광(擊石火閃電光)하는 곳에서 알지 말고, <개에게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없느니라.> 다만 이와 같이 참구할지언정 또한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고, 쉬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만약 마음을 가지고 깨닫고 쉬기를 기다린다면 점점 절충(交涉)되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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