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허공이 곧 법신

팔만 사천 법문은 팔만사천 번뇌를 치료하는 것으로서, 다
만 대중을 교화 인도하는 방편일 뿐 일체 법이란 본래 없다.
그러므로 여의는 것이 곧 법이요, 여의줄 아는 이가 곧 부처
이다. 일체 법을 여의기만 하면 얻을 만한 법이 없으니, 도를
배우는 사람이 깨닫는 비결을 터득하고자 한다면, 마음에 어
느 것이라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부처님의 참된 법신은
마치 허공과 같다'고 한 비유가 바로 이것이다. 법신이 곧 허
공이며 허공이 곧 법신인데도 '법신이 허공계에 두루하고 있
다'고 하면, 사람들은허공 가운데에 법신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법신 그대로가 허공이며 허공 그대로가 법신임을
모른다. 만약 결정코 허공이 있다고 한다면 법신은 허공이 아
니다. 그렇다고 결정코 법신이 있다고 한다면 법신이 허공이
아니다. 다만 허공의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허공이 곧 법신
이니라. 법신의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법신이 곧 허공이니라.
허공과 법신은 전혀 다른 모양이 없으며, 번뇌와 보리도 다른
모양이 없는 것이니, 일체의 모양을 여윔이 곧 부처이니라.
범부는 경계를 취하고 도를 닦는 사람은 마음을 취하나니,
마음과 경계를 함께 잊어야만 참된 법이다. 경계를 잊기는 오
히려 쉬우나 마음을 잊기는 매우 어렵다. 사람들이 마음을 감
히 잊어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공(空)에 떨어져 부여 잡을 바
가 없을까 두려워해서인데, 이는 공이 본래 공이랄 것도 없
고, 오로지 한결 같은 참된 법계[一眞法界]임을 몰라서 그런
갈 견해이니, 밖으로 경계를 좇으면서 그것을 마음이라고 잘
못 알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것은 도둑을 제자식으로 잘
못 아는 격이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에 계.정.혜를 세워 말씀하
신 것인데, 애초부터 번뇌가 없다면 깨달음인들 어디 있겠느
냐?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 일체법을
말씀하신 것은 일체의 마음을 없애기 위함이로다. 나에게 일
체의 마음이 없거니 일체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셨
다. 본래 근원이 청정한 부처에다가는 다시 어떤 것도 덧붙이
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허공이 수많은 보배구슬로 장엄
할지라도 마침내 머무를 수 없는 것과 같다. 불성(佛性)도 허
공과 같아서 비록 무량한 공덕과 지혜로써 장엄한다 하더라
도 마침내 머무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본래 성품이 미혹되
어 더더욱 보지 못할 뿐이다.
이른바 심지법문(心地法門)이란 만법이 이 마음을 의지하
여 건립되었으므로, 경계를 만나면 마음이 있고 경계가 없으
면 마음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깨끗한 성품 위에다가 경계에
대한 알음알이를 굳이 짓지 말라. 또 '정혜(定慧)의 비추는
작용이 역력히 밝고 고요하면서도 또렷하다[寂寂惺惺]'든가, '
보고 듣고 느끼고 안다[見聞覺知]'는 것은 모든 경계 위에서
알음알이를 짓는 것이니, 이 말은 임시로 중하근기의 사람들
을 위하여 설법하는 경우라면 몰라도, 몸소 깨닫고자 하는 사
람은 이와 같은 견해를 지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이것은 모두
경계의 법이므로 유견(有見)이라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일체
법에 대해서 있다거나 없다는 견해를 짓지만 않으면, 곧 법을
보는 것이다.
Posted by 붓다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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