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당문준(湛堂文準)스님은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를 읽고 문장 짓는 법을 터득했다.

그는 「나한공소(羅漢供疏:나한에게 공양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범어의 아라한(阿羅漢)이란 이곳(중국)말로는 '무생(無生)'이라 한다. 그들은 삼계 25종의 번뇌를 벗어나 분단생사(分段生死)를 초월하였으며 여래의 부촉을 받아 천인(天人)의 공양을 받을 만하며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고 복되게 하는 분이다. 그러므로 시주들은 공양을 성대히 해야 한다."

또한 「수마기(水磨記:물레방아에 대한 글)」를 지었다.

"늑담산은 옛날 마조 대적(馬祖大寂)선사께서 많은 선승들과 함께 부처되기를 겨루시던 큰 도량으로 비록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하나 불법에서 멀어진 적이 없는 곳이다. 다만 그동안 선지식들의 경지가 똑같지 않고 간혹 고하(高下)가 있었기에 멀어진 일이 있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마조선사에게 한 스님이 무엇이 부처냐고 묻자 마음이 부처라고 대답한 일 등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중생이 본래 성불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높고 낮음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불법에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말세에는 내가 법을 설하노라 하는 자도 있다. 그러기에 부처가 되려고 스승을 구하면서 이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송 원부(元符)  무인(1098)년에 한중(漢中)의 의충(意忠)스님이라는 분은 스승을 찾아 도를 묻고 부처가 되려고 참선을 하는데 긴장대를 가지고 다니다가 만나면 한바탕 놀다 가곤 하였다. 그 한바탕의 놀음은 일시적인 것이었으나 그 공덕은 천고에 이로움을 주었으니 낡은 제도를 혁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영인은 아직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옛날부터 있어온 틀에다가 상황을 맞춘다. 변통 (變通)이란 나에게 있는 것인데 어찌 규칙으로 큰 뜻을 얽어매 옛사람의 규범에 국한되는가? 이 때문에 제 자식은 가르칠 수 없다고 하였다. 가르치는 것은 언어의 찌꺼기이지 지극히 오묘한 마음의 이치는 아니다. 지극히 오묘한 마음은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언어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설령 밝은 스승이 은밀히 전해주어도 마음으로 스스로 깨닫는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얻고 손으로 응한다는 말이 있다. 이 모두가 신령한 심법(心法)의 묘용(妙用)이다.

그러므로 보리를 찧으려면 맷돌을 써야 하고 쌀을 찧을 때는 연자방아를 써야 하고 국수를 뽑으려면 채를 써야 하고 껍질을 없앨려면 부채를 써야 하는데, 그 규모와 규칙은 모두 빗장에 달려있다. 이 소식만 달통하게 되면 모든 것을 조작하지 않아도 스스로 돌아간다. 물로 비유해 말하자면 한 물결이 움직이자마자 앞 물결 뒷 물결 모든 물결이 줄줄이 이어져 끝이 없다. 맷돌로 말하자면 한 개의 바퀴가 돌자마자 큰 바퀴 작은 바퀴 모든 바퀴가 움직여 끝없이 돌게 됨과 같다. 이로 말미암아 위 아래가 서로 호응하고 높고 낮은 데가 함께 작동하니 그 묘한 작용이란 자연에서 나온 것이어서 사람의 힘을 빌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도 그 기묘함은 볼만하다. 매우 현묘해야만 좌우로 돌고 종횡으로 오가면서 서로 서로 부딪치며 큰 법음(法踵)을 낸다. 그 법음은 모두가 고(苦) ․공(空) ․무상(無常) ․무아(無我)와 바라밀(波羅蜜)이니 듣는 자는 그 마음을 듣고, 보는 자는 그 성품을 보며, 냄새 맡고 맛보고 알아차리는 데 이르기까지 모두 법희(法喜)와 선열(禪悅)을 얻게 될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쌀과 국수 등 여러 가지 공양거리를 만들어 창고와 주방(香積)에 공양하여 이 두 가지로 선승들과 왕래하는 선불자(選佛者)를 배부르게 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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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붓다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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