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보 스님)
경전의 내용을 소개해 나가기 참으로 천차만별, 비유가 있고 철학이 있고, 교양이 있어 대단히 복잡다양함을 알 수 있다. 최근 어느 경전학자의 저서 속에 한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독서라면 경전이 제일이라고 나는 누구에게나 말한다. 얼마든지 읽을 것이 있고 내용도 천차만별이다. 인간에 관한 문제라면 대체로 무엇이든지 씌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얼마 전에 어느 대선배로부터 情死에 관한 것도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 없다고 생각합니다고 즉 답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안되어 <<중아함경>> 제육십을 읽고 있다가 이런 이야기를 발견하였다. 어느 아내가 친정에 찾아갔더니 억지로 다른 데로 시집을 가라고 하자, 남편에게 도망쳐 돌아갔다. 남편은 내세도 함께 살자고 하며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고 한다. 그 이후 나는 경전에 없다고 생각한다 라고 단정하지 않기로 했다.
<<대장경>>을 빠짐없이 정독해 보면 참으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천문, 지리, 광물, 식물, 동물, 생리, 위생, 의학, 약학, 논리, 심리, 정치, 경제, 사회, 가정, 직업, 풍속, 습관등 재미있는 화제가 얼마든지 있다. 우화, 소화, 설화 이야기도 무수하다. 아무리 읽고 읽어도지루하지가 않다."
그리고 또 <이만큼 변화가 풍부한 문헌은 세계에서 다시 찾아 볼 수없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교수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경전만큼 뛰어나고 풍부한 저서는 없다고 잘라 말하면 불교도의 자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여하튼 그 수나다양한 내용은 놀랄 만한 문헌이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경전을 단순한 읽을거리로 보아서는 큰 잘못이라는 점이다. 불교경전은 진리와 약속되어 있는 것으로서 진리로서 그 밑바닥에 찬란히 빛나고 있는 진리를 터득해야 할 것이며 거기에는 스스로 다른 읽을거리와 다른 입장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읽을거리로 낭독할 것이 아니라 숙독하지 않으면 안된다. 숙독이란 잘 맛보고 맛보아서, 씹고 씹어 읽는 것인데 그것을 불교의 말로 간경(看經)이라고 한다.
단지 소리를 내어 읽을 뿐만 아니라 뜻을 잘 새겨서 읽고, 연구하여 읽는다는 것이 간경으로서, 독경이 소리내어 읽는 데 대하여 간경은 묵독하는 것이라고도 말해지고 있다.
다시 더 나아가면 身經이니 色經이라고도 한다. 색경의 색은 육신이라는 뜻이므로 즉 身讀이다. 이것은 몸으로써 읽는, 즉 경전에 씌어 있는 것을 실행한다 라는 뜻이다. 이상의 것을 약간 정리해 보면 경전을 읽는 데에는 세가지 방법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1)소리내어 읽는 구독(독경), 2)뜻을 새겨서 읽는 의독(간경), 3)그리고 경의 내용을 실천하는 신독(색독), 이상의 구독, 의독, 신독의 세가지이다.
이 가운데 구독은 선조의 추선, 또는 자신의 보리를 원할 때 행하는 것이며, 의독은 경전에서 무언가 일상의 지침을 배우고자 할 때 행하는 것이며, 신독은 참다운 신앙생활 속에 불가결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구, 의, 신의 세 가지 읽는 방법은 어느 것이나 종교생활 속에 필요한 것이므로 그런 점이, 경전이 다른 단순히 읽을거리와 다른 점이다. 경전은 어디까지나 종교의 서라는 것을 새삼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본성의 출처
(서경보 스님)
三界唯一心, 心外無別法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화엄경>> 글 뜻을 요약한 것이다. 깊은 불교 철리의 일면을 나타내는 것인데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음미하면 할수록 깊은 맛이 있는 말이라 생각한다.
일반 철학에는 유물론이니 유심론이라는 것이 있다. 억지로 그런 논에 끼어맞추면 이글은 일단 유심론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세간의 유물론자가 반격하는 것 같은 유심론도 아니다.
불교는 心物一如로서 유심에 기울어지는 것도 아니며 유물에 치우치는 것도 아니다. <<능가경>>이라는 경전이 있다. 자세히는 이 위에 다시 대승인이라는 글을 붙인 것이 제명인데, 이 경은, 세일론 남해안의 능가산이라는 산에서 설한 것이므로 그 속에 이 삼계유일시의 이치가 잘 나타나 있다.
그래서 이 경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 하기로 한다. 이 경의 원명을 란카바타 스트라라고 하며, 한문으로 번역된 것이 세 가지가 있으며 네 권짜리, 일곱 권짜리, 열 권짜리의 세 종류이다. 네 권짜리는 또 한 가지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는 않고 보통 일곱 권짜리가 많이 쓰이고 있는 것 같다.
그 내용을 보면, 앞에서 말한 삼계유일심의 이치가 이 경에서 근본이 되어 있다. 삼계라는 것은 욕계, 색계, 무색계를 말하는 것인데 요컨대 우주전체의 일이다. 이 설명만으로는 광신적인 유심론자가 아니냐고 화를 낼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경전에 설명되어 있는 삼계유일심의 이치를 잘 생각해 보면 과연 그것은 깊은 진리인 것을 알 수 있다. 설명하기 위해서, 우주전체를 만유라고 부르기로 하자. 만유는 마음에 비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자기의 인식을 떠나서는 객체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만을 듣는다면 전기한 바와 같이 유심론이라 하겠으나 그 뒤에 석존은 자기의 인식 그 자체마저 부정해버리는 것이다. 자기의 인식을 떠나서 일체의 객체는 없으나 그 인식 그 자체가 오류투성이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 범부가 인식하고 있는 객체는 모두 잘못된 인식 위에서의 환영으로서 그로 말미암아 迷界를 유전하고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석존의 결론은, 이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비로소 참다운 우주, 진실된 만유가 출현하는 것이며, 그것이 깨달음의 세계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식이 어떻게 잘못 되어 있는가 하면, 그것은 차
별이라는 것에 좌우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식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주체와 객체와의 차별관 위에 서있다는 것으로 이 차별의 미망을 초월하지 않으면 오도에 이르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고 있는 만유유심은 세간에서 말하는 유심, 유물론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유일심이라는그 일심마저 부정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는 삼계유일심의 논리가 근본적으로 무너져버리는 것이 아니야고 의문을 갖는 분도 있겠으나 여기서부터 또다시 이론이 전개된다.
일심이 부정되어버리면 일심에 의해서 만유가 만들어져 있다는 이론은 근본적으로 뒤집어져버리는 것이다. 삼계유일심이라는 것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삼계유일심의 이치는 엄연히 존재해 있고, 성립되어 있는 것으로서 여기가 불설의 깊고 깊은 점이다.
여기서 일심이 만유를 이루고 있다는 그 일심은 실로 부정된 일심, 범부의 잘못된 인식작용으로서의 일심은 아닌 것이다. 그 가장 깊은 데에 있는 일심으로서 이 일심만은 절대로 부정되지 않는 일심이며, 이 부정되지 않는 일심 밑바닥에 있는 일심에 의해서 만유가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정되지 않는 일심, 근본이 되는 일심을 아뢰야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능악가경>>에는 이 아뢰야식만이 만유의 근원이며, 일체를 낳게 하는 생명이라고 설하고 있다. (아뢰야식은 아리야라고도 한다.)
이것은 이 경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불교 심리학에서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마음속에 이제 하나의 깊은 마음의 존재를 인식하여 그것을 아뢰야식이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불교의 통론인 것이다. 그래서 약간 어려워지는 것 같은데 이 아뢰야식에 대해서 좀더 정리해서 설명하기로 한다.
마음이라는 것에는 객관을 識하고, 사유하는 작용인 意와 만유를 낳는 마음, 즉 세 가지가 내포되어 있다. 이 가운데 識과 意는 같은 인식작용상의 것이므로 이를 하나로 묶어서 분별사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만유를 낳는 마음이 아뢰야식이다. 분별사식은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마음으로서 범부의 마음이며, 부정되어지는 마음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 아뢰야식은 본질적인 청정한 마음으로서 말하자면 불심인 것이다.
이렇게 말해나가면 점점 이해가 될 줄 안다. 요컨대 우리들의 마음 속에는 범부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이 동거하고 있다. 보통 범부의 마음 속이 표면이 되어 있으므로 거기서 여러 가지 범부의 생활이 나오는 것이며 그 밑바닥에는 부처의 마음이 있으며, 이 부처의 마음이 만유를 낳고 있는 것이다.
즉 부처의 마음이란 대우주에 편만한 대생명 그 자체이며 그것이 곧 아뢰야식이다. 아뢰야식이 우주의 대생명이라면 그 대생명 속에 존재해 있는 우리에게도 당연히 아뢰야식이 머물러 있는 것이다. 우리는 범부라는 껍질을 가진 존재이지만 껍질 그 자체는 우주의 대해에 깊이 적시어져 있다. 즉 해면이 물에 적셔져 있는 것 처럼 우리는 우주의 아뢰야식에 침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부의 마음으로서의 분별사식도 실은 아뢰야식에 침식되어 있다. 따라서 범부의 마음은 부처의 마음에 물들어 있는 것이 된다.
이렇게 되면 안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모처럼 앞에까지는 알 수 있었던 것이 이제 여기에 와서 모르게 되었다는 독자가 나올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분별사식은 시각, 청각, 취각, 미각, 촉각의 지, 감각과 그것에 사유, 상상 등의 의식을 더한 것이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본성으로서 갖추어 있는 것인데, 그 본성은 우주의 생명력에도 또 아뢰야식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아래서 범부는 불심에 의해서 살며, 모든 것 또한 불심에 의해서 성립되어 있는 것이다.
비유에 관해서
[서경보스님]
ㅇ 부처님이 비유로 설하시는 의도
부처님이 의도하는 바와 같은 이해--단순한 논리적 인식을 초월한 고차적인 심령의 이해--를 내면적으로 일깨우는 것은 비유에 의해 가능해진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비유에는 일종의 비밀스러운 힘이 내재하고 있어, 보통의 추상적 개념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깊은 관계를 밝힐 수 있다고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고 보면 고차적인 의식인 부처님의 지혜의 입장에서는 비유로 말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고,
또 부처님의 지혜의 내용은 추상적인 교설보다 오히려 비유의 형태에 있어서 뜻 깊은 표현이 되는 수가 많다. 가령 부처님이 설하는 고차적인 지혜와, 여러 思辨적 학파에서 가르치는 교설과의 구별을 설명함에 있어서 부처님은 비유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매우 뜻 깊은 것이다.
부처님은 몇가지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사변적 사고로는 도달할 수 없다고 단정했는데, 그러한 문제에 관해 논쟁하는 여러 학파의 신도들은 코끼리를 만져 보는 선천적인 소경에 비유된다. 소경들은 각기 코끼리의 몸의 일부분을 만져 보고 이에 따라 코끼리란 이런 것이라 하면서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마침내 논쟁이 주먹싸움으로 발전된다.
이 비유만큼 불교의 본질을 밝히고 불교와 그 이외의 모든 철학과의 구별을 뚜렷이 해 주는 것은 없다. 이 비유의 잘된 점은 먼저, 소경이 모두 논쟁의 대상의 일부분을 만져 보고, 자기의 한정된 감각능력이 허용하는 한에 있어서 그것을 바르게 말하고 있다고 하는 점이다.
불교에 의하면 철학이나 외면적 지식에 의해 사물에 관해 말하는 것은 반드시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한 외면적 의견은 모두 일정한 일면적인 견지에서 진리를 바르게 말하고 있다.
그러한 의견을 말하는 자의 잘못은 이 견해가 유한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의 의견 속에는 모든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점뿐이다. 이에 반해 부처님은 심령을 고차적인 입장으로 유도해서 거기서 심령에게 <관조(觀照)의 지혜>가 열리도록 해주는 것이며, 이와 같은 지혜는 감성에 속박되고 있는 저열한 사고로는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감성적 사고에 집착하면서 우주의 질서를 밝히려고 하는 자는 관조의 지혜에서 본다면 선천적인 소경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심령 속에서 회심(回心)이 생겨, 눈병을 치료받고 비로소 눈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유로 설해지는 많은 것은 부처님의 시대에는 보편적, 추상적인 사고방식으로 말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약과 불법, 믿음은 손과 같다
[서경보스님]
ㅇ 藥과 불법
매우 달인 향로 식물과 시고 짠 약초나 음식물은 감기에는 잘 듣지만, 다른 병에는 듣지 않는다. 혹은 살짝 식힌 달고 쓰고 떫은 약초나 음식물은 열병에는 잘 듣지만, 다른 병에는 듣지 않는다. 그리고 약간 맵고 쓰고 떫고 열이 있는 약초나 음식물은 냉병에는 잘 듣지만, 다른 병에는 듣지 않는다.
불법 중에서 마음의 병(탐욕, 노여움, 어리석음)을 치료하는 경우에도 이상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1)부정관은 탐욕이라는 병에 대해서는 좋은 치료법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노여움이라는 병에 대해서는 좋은 치료법이 아니다. 몸에 얼마만큼 결함이 있는가를 관찰하는 것을 부정관이라 한다. 만약 노여움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의 결함을 관찰하면 노여움의 불은 더욱더 번지기 때문이다.
(2)자비의 노여움의 병에 대해서는 좋은 치료법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은 탐욕이라는 병에 대해서는 좋은 치료법이 아니다. 자비심은 중생으로부터 바람직한 점을 발견하여 그 공덕을 취한다. 만약 탐욕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바람직한 점을 발견하여 그 공덕을 취한다면 그의 탐욕은 더욱더 늘어나기 때문이다.
(3)인연과이란 법은 어리석음이라는 병에 대해서는 좋은 치료법이라 할 수 있으나, 그것은 탐욕의 병, 노여움의 병에 대해서는 좋은 치료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그릇된 관념이 있으면 그 인연에 바탕을 두고 반드시 사견(邪見)이 생기는데, 그 사건이 바로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다.
ㅇ 믿음은 손과 같다.
경전에 의하면 믿음은 손과 같다고 한다. 사람은 손이 있으면 보물의 산에 들어가서 자유롭게 보물을 채취할 수 있을 것이고, 믿음이 있으면 바로 그와 같이 불법의 완전무결한 기관과 힘, 깨달음의 길, 선정이라는 보물의 산에 들어가서 자유롭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손이 없는 것과 같고, 손이 없으면 보물의 산에 들어가도 아무것도 채취할 수 없을 것이므로 믿음이 없으면 바로 그와 같이 불법의 산에 들어가도 전혀 얻는 바가 없을 것이다.
공덕의 힘,
[서경보스님]
ㅇ 공덕의 힘
부처님이 세상에 계시던 당시, 한 소경 비구가 있었다. 눈으로 볼 수 없으므로 손으로 더듬어서 옷을 깁고 있는데 바늘에서 실이 빠졌다.
그래서 비구는 말하였다.
'누가 가져다 주는 복을 소중히 하여 저를 위해 바늘에 실을 꿰어주지 않겠읍니가?' 이때 부처님이 거기에 와서 비구에게 말하였다.
'나는 복을 가져다 주는 공덕을 소중히 하는 사람이요. 그대를 위해 바늘에 실을 꿰어 주려고 왔소.' 비구는 그것이 부처님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얼른 일어서서 옷을 입고 부처님의 발에 예배하고 부처님에게 말하였다.
'부처님의 공덕은 이미 충만합니다. 어찌하여 또 복을 가져다 주는 공덕을 소중히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부처님은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공덕이 충만하지만 그래도 나는 공덕의 은혜, 공덕의 과보, 공덕의 힘을 알고 있읍니다. 나는 일체 중생 중에서 가장 뛰어나게 첫째가 될 수 있게 하고 있는 것은 공덕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나는 공덕을 소중히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 비구를 위해 공덕을 찬양하고 나서 마음 내키는 대로 비구에게 설하였다. 비구는 법에 대한 청정한 눈을 얻고 육안도 밝아졌다.
ㅇ 미녀
한 사람의 미녀에 대해서 말할 때, 음란한 사람이 그것을 보면 그것을 청정하고 절묘하다고 생각하여 그 마음에 집착이 생긴다. 부정관(일체는 부정하다고 보는 관습)을 수행한 사람이 이를 보면 가지가지 악이 드러나 보여 단 한 곳도 정한 곳이 없다. 같은 정도의 여성이 이를 질투하고 화내고 증오하여 눈으로 보려고는 원치 않고 부정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같은 미녀를 음란한 사람이 이를 보면 즐거움으로 보고, 질투하는 사람이 이를 보면 고통으로 보며, 수행을 한 사람이 이를 관하면 부정관을 통하여 깨달음의 도를 얻고, 즐기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이를 보면 전혀 느끼는 바가 없어서 마치 나무를 보는 것과 같다. 만약에 이 미녀가 진실로 정하다면 상술한 네 종류의 사람이 보아서 모두 반드시 정으로 볼 것이다.
만약에 또 진실로 부정하다면 네 종류의 사람이 모두 부정으로 볼 것이다. 이상의 이유로 잘 생기고 못 생김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외부에 일정한 것이 있는 건 아니다.
念의 힘
[서경보스님]
ㅇ 念의 힘
부처님이 계시던 시대에 세 사람이 있었는데 장남과 차남과 막내였다. 세 사람은 비사리국의 창녀로 암라파아리라는 이름의 여자, 사바제의 창부로 수마나라는 이름의 여자, 왕사성의 창부로 우발라바나라는 이름의 여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 때, 세 사람은 각각 이 세 여자가 비할 데가 없을 만큼 용모가 단정함을 칭찬하고 있는 것을 듣고, 낮이나 밤이나 오로지 그 여자에 대해 마음속에 염하여, 마음이 거기 사로잡혀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꿈 속에서 각각 서로 관계를 맺는다. 꿈에서 깨어 마음 속으로 생각 하였다. 그 여자가 이리로 온 것도 아니고 내가 그 쪽에 간 것도 아닌데 남녀 관계가 생기고 말았다. 이 일로 해서 일체의 제법도 모두 이와같은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세 사람은 길을 떠나 발다바라 보살을 찾아가서 이 일에 대해 물었다. 발다바라는 말하였다.
"제법은 실로 그와 같다. 모두 마음에 염하는데서 생긴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이 세 사람을 위해, 방편을 써서 제법의 空함을 설하였다. 세 사람은 즉각 후퇴하지 않는 보살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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