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짓되 최초에 생사를 파하려는 마음이 굳세고, 세계와 몸과 마음이 모두 이 거짓 인연이라 실다운 주재(主宰)가 없는 줄로 간파(看破)할지니라. 만약 본래 갖추어진 큰 이치를 밝히지 못하면, 곧 생사심(生死心)을 깨뜨리지 못하고 생사심을 깨뜨리지 못했을진댄 무상살귀(無常殺鬼)가 생각생 각 멈추지 않으리니, 도리어 어떻게 물리치겠는가? 이 일념(一念)을 가져 문 두드리는 기와쪽을 삼되 마치 훨훨 타는 불꽃 가운데 앉아서 나오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 함부로 한 걸음 걸을 수도 없고 한 걸음도 멈출수도 없으며, 한생각이라도 딴 생각을 낼 수 없으며 남더러 구원해 주기를 바랄 수도 없나니, 이런 때를 당하여서는 다못 사나운 불길도 돌아보지 않으며 신명(身命)을 돌보지 말며 다른 사람이 구해 주기를 바라지도 말며 딴 생각 낼 것도 없으며 잠시도 멈추지 말며 앞으로 곧장 나아가되 내달아서 벗어나야만이 좋은 수단이니라.
공부를 짓되 귀한 것이 의정(疑情)을 일으키는 데에 있으니 무엇을 일러 의정이라 하는고? 태어나되 어디서 온 줄을 모를진댄 온 곳을 의심치 않을 수 없고, 죽되 어디로 가는지 모르건댄 가는 곳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나니라. 생사의 관문을 깨뜨리지 못한 즉 의정이 몰록 일어나리니, 눈썹 위에 맺어 두어 놓을래야 놓을 수 없고 쫓아도 가지 아니하야 홀연 하루 아침에 의심덩어리를 깨뜨리면, 생사 두 글자가 이 무슨 부질없는 것일까 보냐? 엑!
공부해 가는데 제일 두려운 것은 고요한 경계에 탐착하는 것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고적(枯寂)한 데 빠져서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게 함이로다. 시끄러운 경계는 대개 사람들이 싫어하고 고요한 경계는 사람들이 흔히 싫어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수행하는 사람이 항상 떠드는 장소에 처해 있다가 한 번 고요한 경계를 만나면 엿이나 꿀 먹는 거와 같은지라 마치 사람이 오랜 피로 끝에 잠자기를 좋아하는 거와 같거니 어찌 스스로 알 수 있으랴.
공부를 짓되 반드시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하고 굳세고 곧아서 인정을 가까이 하지 말지어다. 진실로 정을 따라 응대하면 공부가 향상하지 못하리라. 다만 공부가 향상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날이 오래고 달이 깊으면 반드시 속된 중의 무리에 휩쓸림이 의심 없으리라.
공부를 지어 가는 사람은 머리를 들어도 하늘이 보이지 않고 머리를 숙여도 땅이 보이지 않으며, 산을 보아도 산인줄 모르고 물을 보아도 물인줄 아지 못하며,가도 가는 줄 모르고 앉아도 앉은 줄 몰라서 천인 만인 가운데서도 한 사람도 보지 못하고, 온몸 안팎이 오직 한개의 의단뿐이니, 의단을 깨뜨 리지 못하면 맹세코 마음을 쉬지 말지니라. 이것이 공부에 긴요한 것이 되나니라.
공부를 지어 가는데 죽고 살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살고 죽지 못할까 두려워할지니 과연 의정으로 더불어 한곳에 맺어 두면, 동(動)하는 경계는 보내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가고, 망녕된 마음은 맑히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맑아지리라. 육근문(六根門)이 저절로 환하게 열려서, 손짓하면 곧 오고 부르면 곧 대답할 것인데 어찌 살지 못할까 걱정하리오?
공부를 짓되 화두를 들 때에 뚜렷하고 분명히 하되, 마치 고양이가 쥐잡듯이 할지니 옛사람이 말하기를 「이노(이奴)를 베지 못하면 맹세코 쉬지 않으리라」하니, 그렇지 않으면 귀신 굴 속에 앉아 흐리멍텅하게 일생을 지내리니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고양이가 쥐잡을 때 두 눈을 부릅뜨고 네 다리를 딱 버티고 다만 쥐를 잡아 입에 넣고야만 마니, 비록 닭이나 개가 곁에 있더라도 또한 돌아볼 겨를이 없나니, 참선하는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아서 오직 분연(憤然)히 이 이치를 밝힐지니, 비록 팔풍경계가 앞에 엇갈리더라도 또한 돌아볼 여가가 없나니라. 조금이라도 딴 생각이 있으면 쥐뿐만 아니라 고양이까지도 달아나버리니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 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속에 들어 앉아서 다만 살 길을 찾는 것 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황벽선사가 이르시되「진로를 멀리 벗어나는 것이 예삿일이 아니니 승두(繩頭)를 꽉 잡고 한바탕 지을지어다. 한 차례 추위가 뼈골에 사무치지 않으면 어찌 매화가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으리오?」하니 이 말씀이 가장 친절한지라 만일 이 게송으로 때때로 경책하면 공부가 자연히 향상하리라.
공부를 짓되 가장요긴한 것은, 이 간절 절(切)자이니 절자(切字)가 가장 힘이 있느니라, 간절치 않으면 해태심이 생기고 해태심이 생기면 방종함이 이르지 아니함이 없으리라. 만약 마음씀이 참으로 간절하면 방일 해태가 무엇을 말미암아 나리요? 마땅히 알라. 절(切)자 한자는 고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할까 근심할 것이 없으며, 생사를 깨뜨리지 못할까 근심할 것이 없느니라.
간절 절(切)자는 한 자는 당장에 선과 악과 무기(無記) 세 가지 성품을 뛰어넘나니, 마음씀이 매우 간절한 즉 선(善)을 생각지 않을 것이요, 마음씀이 매우 간절한 즉 악(惡)을 생각지 않을 것이며, 마음씀이 매우 간절한 즉 무기에도 떨어지지 않나니, 화두가 간절하면 산란심도 없고 화두가 간절하면 혼침도 없나니라.
간절 절(切)자 한 자는 이 가장 친절한 말이니, 마음씀이 간절한즉 틈이 없으므로 마(魔)가 침노하지 못하고 마음씀이 간절하야 「있다, 없다」하는 등 계교하고 헤아림이 나지 아니하면 외도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공부를 짓되 사유하야 시 짓고 게송 짓고 문부(文賦)등을 짓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할지니, 게송을 지으면 이름하되 시승(詩僧)이요, 문장 공부를 한다면 칭하기를 문자승이라, 참선과 모두 아무 관계도 없나니라. 무릇 역경계나 순경계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곳을 만나거든 문득 깨닫고 화두를 들어서 경계의 반연을 따라 끄달리지 말아야 옳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너무 애쓰지 말라」하나니 그 말이 가장 사람을 그르치는 것이라, 학자는 살피지 않을 수 없나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參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 버리거나 집착하거나 변화하는 것이 모두 다 딴 생각이니라.
공부를 짓되 지어서 더 마음 쓸 수 없는 곳과 만 길 벼랑이 떨어진 곳과 물이 다하고 산이 다한 곳과 비단 짤 때 날이 다한 곳에 이르면, 마치 늙은 쥐가 쇠뿔 속에 들어간 듯 저절로 끝장날 것이다.
공부를 짓되 영리심을 가장 두려워할지니, 영리심은 약기(藥忌)가 되느니라. 터럭만치라도 범하면 비록 참약이 나타나더라도 능히 구제하지 못하리라. 만약 진정한 참선객일진댄 눈은 소경 같고 귀는 귀머거리 같으며 생각이 겨우 일어날때에 마치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히는 것 같으리니, 이와 같은 즉 공부가 비로소 서로 응하게 되리라.
공부를 짓되 시끄러움을 피하고 고요함을 향하야 눈을 감고 귀신 굴 속에 앉아 살림살이를 하지 말지니, 고인이 말하기를「흑산 밑에 앉아 썩은 물에 잠겼다」하니 무슨 일을 이루리오? 다만 경계와 반연 위에서 공부를 지어 가야 비로소 이것이 힘을 얻는 곳이니라. 한 귀절 화두를 몰록 일으켜 눈썹 위에 두고서 다닐 때와 앉을 때와 옷 입고 밥 먹을 때와 손님을 맞고 손님을 보내는 속에 다만 이 일구(一句)화두의 낙처(落處)를 밝힐지니, 하루아침에 세수하다가 콧구명을 만지듯 원래로 너무 가까왔느니라.
공부를 하되 향상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 말지니, 향상하지 않거든 향상하도록 하면 문득 이 공부니라. 공부가 향상하지 않는다고 문득 물러서는 북을 친다면 비록 백겁천생(百劫千生)을 지낸들 그 어찌 하리오?
의정이 일어나 놓아 버릴 수 없는 것이 곧 향상하는 길이니, 생사(生死)두글자를 가져 이마 위에 붙여 두되 마치 호랑이에게 쫓기는 것같이 할지니, 만약 곧바로 달려 집에 이르지 못하면 반드시 목숨을 잃으리니 어찌 가히 발을 멈추리오?
공부를 짓되, 다만 한 가지 공안(公案)에만 마음을 쓸지언정 온갖 공안에 따져 알려고 말지니, 비록 풀이해 알게 된다 할지라도 마침내 이것이 알음알이요 깨친 것이 아니니라. 법화경에 말씀하시되「이 법은 생각하고 분별하는 마음으로 능히 알바가 아니니라」하시고, 원각경에 말씀하시되「생각하는 마 음으로 여래의 원각(圓覺)경계를 헤아릴진대 마치 반딧불을 가지고 수미산을 태우려는 것과 같아 마침내 될 수 없는 일이다」하시고, 동산(洞山)이 말씀하시되「마음과 뜻을 가지고 현묘(玄妙)한 종지(宗旨)를 배우려 할진대 마치 서쪽으로 가려는 사람이 동쪽을 향해 가는 것 같도다」하시니,무릇 공안을 천착(穿鑿)하는 자는 모름지기 가죽 밑에 피가 있거든 부끄러운 줄 알 아야 옳다.
도는 잠시도 여의지 못할지니, 가히 여의면 도가 아니요.
공부를 잠시라도 끊이지 못할지니, 끊이면 공부가 아니니라. 진정 참구하는 사람은 마치 불이 눈썹을 태우는 듯하며, 또한 머리에 붙은 불끄듯할지니,어느 겨를에 딴 일을 위해서 마음을 움직이리오? 옛 어른이 말씀하시되「한 사람이 만 사람으로 더불어 싸운다면 마주 보고 어찌 눈인들 깜짝임을 용남하리요」하니, 이 말이 공부를 지어 가는 데 가장 요긴한지라 몰라서는 안되느니라.
공부를 짓되 아침 저녁으로 감히 스스로 게을리 말지니, 자명(慈明)대사는 밤에 졸리면 송곳을 들어 찌르시고 또한 말하시기를「옛사람은 도를 위하야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으셨거늘, 나는 어떤 사람인고?」하셨느니라.
공부를 짓되 의근(意根)을 향하야 헤아리고 따지지 말 것이니, 공부로 하여금 한 조각을 이루지 못하게 할 것이며 의정(疑情)이 일어날 수 없게 하나니, 사유복탁(思惟卜度) 네 자는 바른 믿음을 막고 바른 행을 막는 것이며 겸하야 도의 눈을 가리우는 것이니, 공부하는 이는 이것을 마치 원수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공부를 짓되 시러금 종사가 거량하는 곳을 향하야 알아맞히려 하지 말지니,만약 알아 맞히려 하면 바로 이른바 「어리석은 바보」인지라 공부에는 아무 소용이 없느니라. 다못 모름지기 의정을 일으켜서 하여금 알려고 할 곳도 없고,또한 알려고 할 자도 없는 데에 사무치면, 마치 허공의 누각이 칠통팔달함과 같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도적을 그릇 알아 자식으로 삼는 것이며, 종을 그릇알아 상전을 삼는 것이라, 옛 어른이 말씀하시기를「나귀의 등뼈를 가져 아비의 턱이라고 하지 말라」하시니, 이를 이름인저.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길 요구 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 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공부를 짓되 다만 공안을 염(念)하지 말지니 염(念)해 오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염(念)하야 미륵불이 나오실 때까지 이를지라도 또한 소용이 없을 것이니 차라리 아미타불을 염(念)한다면 공덕이나 있지 않겠는가? 다만 하여금 염(念)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각기 화두를 거각할지니「무자(無字)」상에 나아가 의심을 일으킬 것이요,「백수자(柏樹子)」를 한다면「백수자」 에 나아가 의심을 일으킬 것이요,「일귀하처(一歸何處)」를 한다면「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하고 의심할지니, 의심이 일어나면 온 시방세계가 한낱 의심덩어리라 부모나 제 몸과 마음이 있는 줄도 모르며 시방세계가 있는 줄도 모르며 안팎이 없이 한 뭉치가 되어선 하루에 통테가 절로 터지듯 하리 니, 선지식을 다시 친견하면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 않고 큰일을 해 마치리라.
공부를 짓되 잠깐이라도 바른 생각을 잃지 말지니, 만약 참구하는 한 생각을 잃어버리면 반드시 이단(異端)에 들어가 아득히 돌아오지 못하리라. 어떤 사람이 고요히 앉아 맑고 깨끗한 것만 기뻐해서, 순수하고 맑고 티끌이 끊어진 것으로 불사(佛事)를 삼는다면, 이는 바른 생각을 잃어서 맑은 데에 떨어진 것이라 부르는 것이요, 혹 능히 강설(講說)하고 능히 말하고 능히 움직이고 능히 고요할 줄 아는 것을 그릇앎으로 불사를 삼는다면 이는 바른 생각을 잃고 식신(識神)을 잘못 안다 부름이여, 혹 망녕된 마음을 가지고 억지로 눌러 망녕된 마음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불사를 삼으면 이를 불러 바른 생각을 잃은 것이라, 돌로 풀을 눌러 놓은 것과 같으며 또한 파초잎을 벗겨 내는 것과 같은 것이요, 혹 몸이 허공과 같다고 관하야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을 장벽(牆壁)과 같이 하면 이는 바른 생각을 잃는 것이라 공(空)에 떨어진 외도이며, 넋이 흩어지지 않은 죽은 사람이라 부르는 것이니, 통털어 말하건대 다 바른 생각을 잃기 때문이니라.
공부를 짓되, 의정이 일어났거든 다시 그 의정을 깨뜨려야 하나니, 만약 깨뜨리지 못한 때에는 마땅히 바른 생각을 확실하게 하되 큰 용맹심을 발하야 간절한 가운데 더한층 간절을 더해야사 옳다, 경산(徑山)스님이 말씀하시되「대장부가 결단코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궁구하고저 할진대, 첫째로 체면을 차리지 말고 성급히 척추뼈를 똑바로 세워 인정에 따르지 말고, 평소에 자기가 의심해 오던 것을 잡아 이마 위에 붙여 놓고 항상 남의 돈 백만 관을 빚진 사람이 빚장이에게 추심을 받되 갚을 물건이 없어 남에게 수치와 욕을 입을까 두려워하야,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없으며, 이보다 더 바쁜 일이 없으며, 이보다 더 큰일이 없는 것같이 하여야사 비로소 공부를 해나갈 분이 있느니라」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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